누가복음 22:7-15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reclined)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 촛불 켜기 - "나는 세상의 빛이요" - 요한복음 8:12; 마태복음 5:14
*** 두 개의 촛불을 킨다.
바뤃 아타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아쉐르 키드샤누 비드바로 우비쉬모 아낳누 마드리킴 하네롵 쉘 욤 토브. 아멘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분하시고, 이 토브한 날에 주님의 이름으로 불을 붙이도록 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쉐헤히야누, 베키이마누, 베히기야누 라즈만 하제. 아멘
우리에게 지금까지 생명을 주시고, 지탱시켜 주시며, 이 시즌/순간까지 올 수 있게 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2. 4 잔의 와인 - 출애굽기 6:1-8
4잔의 와인을 마시게 된 전통은 하나님께서 모쉐에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구속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신 다음의 출애굽기 말씀에 근거한다.
출애굽기 6:6-7
구분하시고 -
Sanctification: I will bring you out... (너희를 빼내며...)
구출하시며 -
Deliverance: I will set you free/deliver you... (너희를 건지며...)
구속하시고 -
Redemption: I will redeem you... (너희를 속량/구속하여...)
백성으로 삼으신다 - Acceptance: I will take you as my own...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3. 첫 번째 잔: 구분시키시는 잔 (The Cup of
Sanctification) - 출애굽기 6:6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보레이 프리 하가펜. 아멘
포도나무의 과실을 창조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페싸흐 세데르를 하시면서 포도나무의 과실에서 나온 포도주를 함께 나누셨다.
누가복음 22:17
그리고 잔을 받아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이것을 받아서 함께 나누어 마셔라..."
*** 첫 번째 잔을 마신다.
4. 첫 번째 손 씻기 (첫 번째 상징적 침수 -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예수님께서 이 날 밤 제자들에게 행하신 것을 기억하자:
요한복음 13:5, 10, 12-1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미 하늘로부터 거듭나고, 누룩이 없는 새피조물, 바로 맛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온 몸을 씻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이미 정결하다고 말씀하신다. 밖에서 다니면 발에 먼지가 묻듯이, 우리도 새 피조물로 살다가도 우리의 "walk" (삶)에 "먼지"가 묻을 수 있다. 연약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 피조물의 정체성으로 사는 연습을 하다가도, 죄로 빗나가 더러워지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나의 전 존재가 다시 "죄인"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 발, 삶에서의 걸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고 발을 씻으면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형제의 연약함을 알지만 덮고 진리의 정체성으로 세워주는, 서로서로 발을 씻어주는 섬김을 하도록 모본을 보여 주신다.
*** 돌아가면서 손 씻기 (서로서로 상대방이 씻을 수 있도록 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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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싸흐 접시 - 페싸흐 이야기를 기억하도록 돕는 요소들: 파슬리와 소금물; 하로셑과 마로르 (와사비 또는 horseradish - 서양 고추냉이); 양고기 뼈
5. 파슬리
출애굽기 2:23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소금물은 세상, 거짓, 죄의 노예가 된 것의 고통과 슬픔의 눈물로 나타낸다.
이러한 노예의 집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구분해서 구출하고 구속해 내셨는가? 여호와의 페싸흐를 통해서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양을 잡아서 우슬초를 그 피에 담근 후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다. 파슬리를 물에 담그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나게 해 준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구분되어져서 구출 받는 것은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해방되는 길, 생명의 길을 주셨다. 하나님의 지시를 믿고 따르는 것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백성 모두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양의 피를 하나님께서 믿음의 행위로 보시고 죽음이 임하지 않게 하심으로 이 가정은 구분되어지는 것이었다.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보레이 프리 하아다마. 아멘
땅의 소산을 창조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 파슬리를 소금물에 찍어 죄의 고통도 기억하지만, 양의 피를 믿었음을 기억하면서 먹는다.
* 중요한 질문: 출애굽기 12-13장에서 말씀하시는 "페싸흐"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문설주와 인방에 믿음의 행위로 바른 피를 보셨을 때에, 이 집안에 죽음이 임하지 않고 건너 뛰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 축제를 "유월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넘어가는 행위에 근거한다. 출애굽기 12장 13b과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페싸흐"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정확히 어떤 문맥에서 쓰여지고 있는가 이다. 12장 1절부터 11절까지 하나님께서는 니산월 10일에 집안에 들여온 1년 된 흠 없는 숫양을 14일 되는 날에 언제 어떻게 잡아서 어떻게 먹어야 할 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지시하신다. 11절에 결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신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페싸흐이니라."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건너 뛰는 행위가 아니라,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온 가족이 급히 구워서 먹은 숫양인 "여호와의 페싸흐"이다. 그래서 모든 초점은 하나님의 페싸흐 양에 있는 것이다.
오늘 날까지 풀어지지 않은, 페싸흐 세데르 만찬에서의 가장 큰 미스테리: 아피코멘
페싸흐 세데르 만찬은 온 가족, 즉 다음 세대인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하면서 배우는 시간이다. 그래서 세데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절차는 아이들로 하여금 질문을 하게 만들도록 디자인 되어졌다. (그게 뭐에요? 왜 이렇게 해요? 등)
6. Yachatz (야하쯔) - 아피코멘을 반으로 부숴서 반을 숨기는 순서
(The Breaking of the
Afikomen)
*** 가장인 아버지가 접시에 놓인 3개의 맛짜 중 중간에 있는 맛짜를 빼서 반으로 부순 후, 반은 흰 세마포에 쌓아서 자녀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는 집안 어딘가에 숨긴다.
7. Maggid (마깃드) - 페싸흐 이야기 나누기
*** HaLachma (하 라흐마--아람어) - 초청: 페싸흐 양을 기념하자
신명기 8:3 -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4: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아버지가 상징적 음식을 담고 있는 페싸흐 접시를 들고 "하 라흐마"를 통해서 이렇게 참가자들을 초청한다:
"배고픈 자들은 누구든지 들어와 함께 빵을 나눕시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먹은 고통의 빵입니다. 누구든지 배고픈 자들은 들어와 함께 빵을 나눕시다. 누구든지 궁핍한 자들은 와서 페싸흐를 기념합시다. 올해는 이곳 (이집트 땅)에서 기념하지만,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기념하기를 소망합니다. 올해는 (이집트 땅에서) 묶인 자들로 기념하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기념하기를 소망합니다."
왜 이러한 초청으로 세데르 만찬을 시작하는가?
페싸흐 세데르의 스피릿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축제 속에서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을 인정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자유케 된 존재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 땅에서 축하하고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내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묶여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지난 1년 동안 노예처럼 살아온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데르 만찬에 처음 임할 때에는 "고통의 빵", 또는 "가난한 자의 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빵은 누룩이 없는 맛짜이다. 하나님께서는 페싸흐 (유월절) - 맛쪼트 (무교절) 기간 동안 이 "고통의 빵", "가난한 자의 빵"을 먹으라고 지시하신다. 우리가 여기서 "가난하다"라고 했을 때에는, 경제적인 가난을 뜻하기 보다, 상징적인 "노예의 집"에 노예처럼 묶여있고, 영적으로 빈곤하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게 무슨 뜻이에요? 왜 이렇게 하는 거에요?"하고 질문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라고 지시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집트 땅, 노예의 집에서 구출해 내셨을 때에..." 그런데, "나"라니??? 어떻게 3,4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내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마다 똑같이 답하라고 지시하신다: "나는 이집트에서 노예였고,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곧 노예의 집에서 나를 구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내가 배고프지 않다면 (영적 배고픔,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향한 굶주림이 없다면), 나는 이 식탁에 함께할 필요도 없고, 환영 받을 이유도 없다. 이 "고통의 빵"에 동참할 아무런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만이 이미 나에게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주어진 자유를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힘과 만족을 주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갈망과 굶주림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스피릿으로 이 초청에 임하고, 세데르에서 나오는 모든 상징적인 요소들을 두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나는 이 세데르에 임했을 때에, 분명 내 삶에 어떠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통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나에게 어떠한 배고픔이 있다. 이 배고픔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나는 지금까지 삶을 살아온 패턴과 방법, 나와 남에게 고통스러운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왔는데, 이번 페싸흐를 제대로 참여하고 기념할 때에, 분명 답을 찾게 될 것이다--"누구든지 배고픈 자들은 들어와서 함께 빵을 나눕시다!"
답은 어디에 있는가? 페싸흐를 기념하는 것--특별히 출애굽기 12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페싸흐 양을 기념하는데 있다. 나를 위해서 희생되어지고 온전히 주어진 생명을 기념하고, 이 세데르에 내 전 존재를 다해서 동참한다면, 나의 네페쉬 (총체적 존재), 나의 배고픔이 충족될 것이고, 소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난 한해 동안 나는 빗나가는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오면서 나에게 주어진 진정한 자유로 하나님의 공의를 살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페싸흐 양의 기억하면서 세데르에 진지하게 동참하면, 지난 해의 매여있던 부분에서 자유케 될 것이다. 우리는 구분시키시는 잔에 참여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나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내가 지난 한해 동안 멈추지 못한 불의의 행동, 태도, 생각들은 무엇인가? 내가 무언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갈망 자체가 내가 자유인임을 알려주고 있고, 나에게는 멈출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 행동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가? 왜 멈추지 못하고 있는가? 함께 페싸흐 양을 기념하고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소망을 통해 우리를 자유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페싸흐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나누게 된다. 옛적에 우리의 조상들에게 일어난 이야기이지만, 지금 나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로 내가 재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 "Ma Nishtana" ("마 니슈타나") - 4개의 질문
출애굽기 12:26-27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들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 다음 노래를 부른다.
"이 날 밤은 다른 모든 밤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마-니슈타나 하라일라 하제, 미콜-하레이롵, 미콜-하레이롵?)
1) 다른 모든 밤에는 빵 또는 맛짜를 먹습니다.
(쉐베콜-하레이롵 아누 옼흐린 하메쯔 우맛짜, 하메쯔 우맛짜.)
이 날 밤에는 맛짜만 먹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라일라 하제, 하라일라 하제 쿨로--- 맛짜---?)
2) 다른 모든 밤에는 여러 종류의 야채를 먹습니다.
(쉐베콜-하레이롵 아누 옼흐린 쉐아르 예라콭, 쉐아르 예라콭.)
이 날 밤에는 쓴 나물만 먹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라일라 하제, 하라일라 하제 쿨로--- 마로르---?)
3) 다른 모든 밤에는 단 한번이라도 침수하지 않습니다.
(쉐베콜-하레이롵 엔 아누 마트빌린, 아필루 파암 에하트, 아필루 파암 에하트.)
이 날 밤에는 두 번이나 침수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라일라 하제, 하라일라 하제 슈'테이- 파아밈---?)
4) 다른 모든 밤에는 밥을 먹을 때에 앉아서 먹거나 누워 기대서 먹습니다.
(쉐베콜-하레이롵 아누 옼흐린, 벤 요슈빈 우벤 메수빈, 벤 요슈빈 우벤 메수빈.)
이 날 밤에는 누워 기대서 먹는데, 왜 그렇습니까?
(하라일라 하제, 하라일라 하제 쿨라누 메수빈---?)
(2) 4개의 질문에 상징적인 음식을 통해 답을 설명한다.
Q: 하나님께서는 이 세데르 식사를 어떻게 먹으라고 지시하시는가?
출애굽기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페싸흐이니라
-- 하나님의 지시에 나도 동의한다. 나를 노예로 묶고 있는 것에서 정말 빨리 떠나고 싶고, 실제로 단번에 빨리 떠나야 한다. 절대로 머뭇거리면 안된다고 하신다.
1) 왜 맛짜만 먹습니까?
(문맥을 보면, 급히 떠나야 하기 때문에 반죽이 부풀 시간 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맛짜의 뜻은 무엇인가? - 분명 누룩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뜻은, "to be drained out"--누룩이 다 빠진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 누룩을 뺀 필수 재료는 무엇인가? - 밀가루와 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페싸흐로 시작해서 7일 동안 맛짜를 먹으라고 하신다. 7일 동안 먹으면서 필수 재료, 그러니깐 본질에만 초점을 두고 생각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로 무엇을 배우고 몸에 베고 각인이 되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맛짜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6b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맛짜)인데 새 덩어리(반죽)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맛짜로 하자
우리의 페싸흐 양 곧 메시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에 나는 맛짜인데, 나의 새 피조물의 본질이 맛짜이기 때문에, 묵은 누룩을 내 버리는 것은 마땅하다. 이와 같이 맛짜는, 희생된 페싸흐 양 예수님으로 인해 새 피조물이 되어 온전히 하나님 안으로 회복된 나의 새 피조물된 창조적 본질을 알려준다.
맛짜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창조주께서 의도하신 생명이요, 삶이다. 창조주께서 의도하신 풍성한 생명의 삶에 필수인 것들은 무엇인가?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생명의 본질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비본질적인 것들의 노예가 되어 생명이 마땅히 살아지도록 창조주께서 의도하신 본질을 잃고 살고 있는가? 창조된 본질을 잃고 사는 것은 죽음이 아니겠는가?
(창세기 2:7 - "네페시 하야" = 살아있는 생명. 그렇다면 살아는 있지만 생명 없이 사는 인생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다.)
*** 식탁 교제: 맛짜를 먹으면서 생각해볼 것--생명의 빵의 필수 재료는 무엇인가?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6:35, 48). 죄, 또는 빗나감이 없는 인생, 생명, 삶의 본질이 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에 적중하는 생명의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하나님은 누룩 없는 생명의 빵의 본질을 7일 동안 먹으라고 하신다. 완전 수 7일 동안 맛짜--생명의 본질, 나의 새 피조물된 본질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먹으라고 하신다 (생각 나무 세우기).
더 나아가 오멜을 하루, 하루 세면서 7일을 7번 지내면서 50일째에 샤부옷 (칠칠절)을 지키라고 하신다. 그 날에는 누룩이 들어간 빵을 새로이 추수한 밀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도록 지시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의도하고 계시는가? 이를 보았을 때에, 누룩은 다만 죄를 상징하고만 있지 않다. 페싸흐에서부터 시작해 50일이 지난 샤부옷에 이르렀을 때에 (8주 후) 누룩은 새 생명을 나타내고 있다. 나의 순전하고 진실된 본질을 매일, 매일 생각하면서, 50일 동안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transfiguration)가 일어나 이제는 진정한 새 피조물의 정체성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누룩은 생명력이 반죽에 다 퍼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적 개념의 하멧쯔 (누룩)는, 내가 살고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의 본질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비본질적인 것들에 얽어 매여서 그것이 전부인줄 착각하고, 자유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처럼 살고 있는가? 페싸흐 전에는, 그 때까지 살아온 빗나가는 삶, 노예된 삶의 방식들이 "누룩"이기 때문에, "고통의 빵" (bread of affliction, because my nefesh is impoverished)으로 시작하지만, 페싸흐를 맞이하면서 무교절 (하그 맛쫕)과 샤부옷까지의 여정을 다 이루었을 때에는, 생명의 본질만 생각하면서 빗나가는 삶의 방식을 빼냈기 때문에, 생명의 라이프 스타일로 변화된다.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하못찌 레헴 민 하아렛쯔. 아멘
땅에서 빵을 소산으로 주시는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 맛짜를 함께 나누면서 먹는다.
2) 왜 마로르 (쓴 나물-horseradish/와사비)만 먹습니까?
맛짜를 먹으면서 생명의 본질,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비본질적인 것들에 얽매여서 본질을 놓치고 살아왔는지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맛짜를 먹으면서,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고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에, 그것을 너무 많이 놓치고 살아온 것에 대해 한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쓴 나물을 먹는 이유는, 눈물이 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나의 새 피조물의 본질대로 살아오지 못한, 빗나간 삶의 방식을 두고 내가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나는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피조물로 거듭났고,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인데, 그렇게 살지 못해 내 자신과 주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가해왔으니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너무도 정확하게 이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서 7:19, 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로르, 쓴 나물을 먹으면서, 시간을 내서 내 삶을 빗나가게 하는 한가지 습관, 태도, 행동, 반응 등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어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요인은 무엇인가? 만약에 생각이 잘 안 난다면, 식탁을 둘러 앉은 사랑하는 식구들,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어떠한 삶의 방식이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슬픔, 근심을 주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쓴 뿌리를 갖게 하는 나의 누룩(하멧쯔)와 빗나감(하타)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 이상 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느 정도의 동기가 될 수 있다.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아쉐르 키드샤누 비드바로 벳찌바누 알 아힐랕 마로르. 아멘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구분하시고 쓴나물을 먹으라고 명령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 맛짜를 마로르 (와사비)에 완전히 덮어서 먹는다.
나의 본질 (맛짜)을 덮어 버린 것이 나의 빗나간 삶의 방식이고, 이것이 얼마나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왜 두 번 침수합니까 (미크베의 개념)?
로마서 6:3-4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수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수한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수함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첫 번째 침수: 출애굽기 14장.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양 옆에 광야, 뒤에는 바로와 군사, 그리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다. 후진을 하면 다시금 노예로 잡혀가는 죽음이 있었고, 양 옆은 생명이 없는 광야, 코 앞은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바다가 있었다. 사방에는 죽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것을 "침수한" 것, 그래서 사실 상 죽은 것인데, 마른 땅으로 건널 수 있었기 때문에 기적적인 하나님의 구원(예슈아)을 경험한 것으로 이해한다.
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예슈아)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육안으로 보이는 죽음을 향한 이 발걸음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다)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구원이 되었다)
사도 바울도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을 침수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수하고...
예슈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예슈아, 구원을 이루시는데 있으시다. 하나님의 페싸흐 양이 되셔서 구속을 이루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물에 믿음으로 침수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두 번째 침수: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번째 침수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광야에서 이집트의 "노예의 집"의 고통 가운데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출 6:9)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계시를 보고, 듣고, 받을 수 있도록 훈련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움직임 (구름기둥/불기둥)만 따르도록 실질적으로 훈련하신다. 더 이상 나의 논리, 나의 생각, 나의 계산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만 따라서 움직이는 "일심동체"의 광야 훈련을 마치신 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신다. 광야에서부터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요단 강을 멈추게 하셔서 마른 땅을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두 번째 "침수" 사건이 바로 여호수아 1-5장에 나오는, 요단 강을 건너는 사건이다. 첫 번째 침수는 이집트에서 광야로 들어갈 때 이루어졌고, 두 번째 침수는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이루어졌다.
페싸흐 세데르에서 이 두 번의 침수를 상징적으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6장 6절에서 8절까지 약속하신 구분, 구출, 구속, 연합 (4개의 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의 땅에 훈련되어 들어가는 데까지 모두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예의 집에서 해방되어 광야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고 삶의 훈련을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광야가 목적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 피조물의 새로운 생명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그랬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온 열방의 눈에 보이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왕의 말씀대로 살았을 때에,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가 드러나도록 창조주는 디자인 하셨다.
페싸흐 세데르에서 방금 나는 마로르--쓴 나물로 덮여진 맛짜를 먹었다. 나의 누룩, 나의 빗나가는 삶의 방식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것이 얼마나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는 지에 대해 동의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 시내 산 앞, 광야에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과 같이, 이제 나도 세데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었고, 궁극적으로 말씀으로 인해 훈련되고 빚어져서 내 정체성에 걸맞는 삶의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게된 것이다.
이러한 큰 움직임에 대해서 침례 요한도 요단 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하나님 안으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수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수를 베푸실 것이요"...
침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하는 일의 목적: 첫 번째 침수 -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한번 "출애굽"시켜서 광야로 인도하여,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백성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 회개.
침례 요한 뒤에 오시는 능력자 메시아께서 하실 일의 목적: 두 번째 침수 - 광야에서 하나님(아버지, 아들, 성령)은 구름 기둥, 불 기둥의 영광으로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을 말씀으로 빚으시는 훈련을 하셨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으로서 성령 (구름 기둥)과 불 (불 기둥)로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 (제자들)을 훈련하셔서, 광야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왜 누워 기대서 먹습니까?
누워서 기대서 먹는 것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했을 당시의 문화였고, 자유인 임을 상징했다. 새 피조물인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었다.
페싸흐 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집트에 있지 않고, 광야에도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영훤한 언약을 통해 유업으로 주신 약속의 땅에 자유인으로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삶에서 연습해야 할 것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 출애굽 이야기 (성경을 함께 읽거나 성경 말씀을 따라 스토리 텔링 또는 스킷?)
8. 하나님께서 내리신 10개의 재앙
출애굽기 12:12b -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모든 신과 이집트 문명의 모든 세계관, 신앙 시스템을 심판하신다. 이집트가 의존해온 시스템이 박멸되면서 이집트의 백성은 고통을 당한다.
예) 나일 강과 모든 물과 수원지가 피로 변하다. - 나일 강은 문자 그대로 이집트의 생명수, 생명의 근원이다. 매해 홍수로 인해 강이 불고, 물이 다시 줄어 들었을 때의 땅은 옥토가 되어 이집트에 풍요로움을 준다. 이집트는 나일 강 자체를 숭배하지는 않았지만, 강의 움직임, 변화와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숭배했다.
역전: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여 노예로 삼고, 백성들에게 모든 남아들을 나일 강에 던져서 죽이라고 했었다. 이집트에게는 생명인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죽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일 강이 더 이상 생명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서 이집트의 모든 시스템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파괴와 고통이 일어날 때에 이스라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보통 원수가 망하면 우리는 기뻐하고, 축제를 벌인다. 그러나 고통하는 이집트인들로 인해 기뻐해서는 안된다. 이번 순서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를 가르쳐주고 있다.
***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하는데, 바로의 고집과 완악함으로 인해 일어나게 된 10개의 재앙, 이집트의 모든 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집트 백성에게 매우 고통스러웠다. 포도주에서 기쁨을 앗아가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자기 잔에 있는 포도주에 찍었다가 자기 접시에 한 방울씩 찍으면서 10개의 재앙을 선포한다:
피! 개구리! 파리! 야생 동물들! 가축 병!
종기! 우박! 메뚜기! 어두움! 장자들의 죽음!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태도는, 우리의 원수가 마땅히 받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원수에 대한 생각을 가르쳐 주신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까지도 구속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급히 도망 나왔을 때에, 말씀은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애굽기 12:37-38)
10 재앙을 경험한 이집트 백성들 중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 한 민족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위대한 이집트의 탁월한 문명과 풍요로움, 막강하다고 믿었던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좇아 출애굽 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가장 위대하신 것 뿐만 아니라,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여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 "수많은 잡족"을 출애굽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믿음을 건 사람들 만이 출애굽했고, 출애굽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그룹으로 다루심을 볼 수 있다.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가 하나님으로부터 공의의 심판을 받음으로 우리에게 구출이 이루어질 때 이들을 향한 우리의 생각과 태도는 애통함 (grieving)이어야 하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로 남아있지 않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리라.
9. Dayenu (다이예이누) - "그렇게 안 하셨어도 충분했다."
(주후 70년에 로마로 인해 하나님의 집이 파괴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고난과 혼돈이 임했을 암흑시기에 이 노래를 페싸흐 하가다에 집어 넣었다. 그 이유는 가장 고통스럽고 불확실하고 어두울 때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할 지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을 끊임없이 베푸시며, 오직 은혜와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다루신 것을 돌이켜 보았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 출애굽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선포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도 충분했다, 만족한다, 전혀 괜찮다, 감사하다--고 노래로 고백하는 시간
- 다른 말로 고백하자면,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신실하심과 사랑으로 우리에게 덤으로 주셨음을 감사하는 시간이다:
"하나님, 아무리 어려워도 만족합니다. 아무리 불확실해도 샬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자유 안에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나의 고백, 나의 예배
English translation |
Hebrew |
||
Ilu hotzianu
mimitzrayim, |
אִלּוּ הוֹצִיאָנוּ מִמִּצְרָיִם |
||
and had not carried out
judgments against them |
v'lo asah bahem
sh'fatim, |
וְלֹא עָשָׂה בָּהֶם שְׁפָטִים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carried out
judgments against them, |
Ilu asah bahem sh'fatim |
אִלּוּ עָשָׂה בָּהֶם שְׁפָטִים |
|
and not against their
idols |
v'lo asah beloheihem, |
וְלֹא עָשָׂה בֵּאלֹהֵיהֶם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destroyed
their idols, |
Ilu asah beloheihem, |
אִלּוּ עָשָׂה בֵּאלֹהֵיהֶם |
|
and had not smitten
their first-born |
v'lo harag et
b'choreihem, |
וְלֹא הָרַג אֶת בְּכוֹרֵיהֶם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smitten their
first-born, |
Ilu harag et
b'choreihem, |
אִלּוּ הָרַג אֶת בְּכוֹרֵיהֶם |
|
and had not given us
their wealth |
v'lo natan lanu et
mamonam, |
וְלֹא נָתַן לָנוּ אֶת מָמוֹנָם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given us
their wealth, |
Ilu natan lanu et
mamonam, |
אִלּוּ נָתַן לָנוּ אֶת מָמוֹנָם |
|
and had not split the
sea for us |
v'lo kara lanu et
hayam, |
ןלא קָרַע לָנוּ אֶת הַיָּם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split the sea
for us, |
Ilu kara lanu et hayam, |
אִלּוּ קָרַע לָנוּ אֶת הַיָּם |
|
and had not taken us
through it on dry land |
v'lo he'eviranu b'tocho
becharavah, |
וְלֹא הֶעֱבִירָנוּ בְּתוֹכוֹ בֶּחָרָבָה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taken us
through the sea on dry land, |
Ilu he'eviranu b'tocho
becharavah, |
אִלּוּ הֶעֱבִירָנוּ בְּתוֹכוֹ בֶּחָרָבָה |
|
and had not drowned our
oppressors in it |
v'lo shika tzareinu
b'tocho, |
וְלֹא שִׁקַע צָרֵינוּ בְּתוֹכוֹ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drowned our
oppressors in it, |
Ilu shika tzareinu
b'tocho, |
אִלּוּ שִׁקַע צָרֵינוּ בְּתוֹכוֹ |
|
and had not supplied
our needs in the desert for forty years |
v'lo sipeik tzorkeinu
bamidbar arba'im shana, |
וְלֹא סִפֵּק צָרַכֵּנוּ בַּמִּדְבָּר אַרְבָּעִים
שָׁנָה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supplied our
needs in the desert for forty years, |
Ilu sipeik tzorkeinu
bamidbar arba'im shana, |
אִלּוּ סִפֵּק צָרַכֵּנוּ בַּמִּדְבָּר
אַרְבָּעִים שָׁנָה |
|
and had not fed us the
manna |
v'lo he'echilanu et
haman, |
וְלֹא הֶאֱכִילָנוּ אֶת הַמָּן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fed us the
manna, |
Ilu he'echilanu et
haman, |
אִלּוּ הֶאֱכִילָנוּ אֶת הַמָּן |
|
and had not given us
the Shabbat |
v'lo natan lanu et
hashabbat, |
וְלֹא נָתַן לָנוּ אֶת הַשַּׁבָּת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given us
the Shabbat, |
Ilu natan lanu et
hashabbat, |
אִלּוּ נָתַן לָנוּ אֶת הַשַּׁבָּת |
|
and had not brought us
before Mount Sinai |
v'lo keirvanu lifnei
har sinai, |
וְלֹא קֵרְבָנוּ לִפְנֵי הַר סִינַי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brought us
before Mount Sinai, |
Ilu keirvanu lifnei har
sinai, |
אִלּוּ קֵרְבָנוּ לִפְנֵי הַר סִינַי |
|
and had not given us
the Torah |
v'lo natan lanu et
hatorah, |
וְלֹא נָתַן לָנוּ אֶת הַתּוֹרָה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given us
the Torah, |
Ilu natan lanu et
hatorah, |
אִלּוּ נָתַן לָנוּ אֶת הַתּוֹרָה |
|
and had not brought us
into the land of Israel |
v'lo hichnisanu l'eretz
yisra'eil, |
וְלֹא הִכְנִיסָנוּ לְאֶרֶץ יִשְׂרָאֵל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
If He had brought us
into the land of Israel, |
Ilu hichnisanu l'eretz
yisra'eil, |
אִלּוּ הִכְנִיסָנוּ לְאֶרֶץ יִשְׂרָאֵל |
|
and not built for us
the Holy Temple |
v'lo vanah lanu et beit
hamikdash, |
וְלֹא בָּנָה לָנוּ אֶת בֵּית הַמִּקְדָּשׁ |
|
— Dayenu, it would have
been enough! |
dayeinu! |
דַּיֵּנוּ |
두 번째 포도주 잔을 위해 준비시켜 주는 노래이다.
10. 구출의 잔 (The Cup of
Deliverance)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보레이 프리 하가펜. 아멘
포도나무의 과실을 창조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 두 번째 잔 마시기.
11. 두 번째 손 씻기 (두 번째 상징적 침수 - 광야에서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 돌아가면서 서로 손을 씻도록 섬기면서 손을 씻는다.
12. 페싸흐 만찬 (The Pesach Supper)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니산월 10일에 집으로 들여온 양을 이제 14일 되는 날 저녁에 온 가족이 함께 먹는다. 물론 지금은 아버지의 집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양을 제물로 드리지 못한지 2,000년 되었다. 그래서 양 다리 뼈 등을 상징적으로 페싸흐 접시에 하나의 요소로 놓는다. 여기서 기억하는 부분은 출애굽기 12장에서 일어난 놀라운 구속의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가정마다, 또는 식구의 수가 적으면 몇몇 가정이 합쳐 되는대로 모여서 양을 잡아다가 그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우슬초로 발랐다. 이러한 행위는 이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고, 13절 말씀에 그 피는 이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 다음 말씀이 매우 중요한데, 하나님께서 이들이 믿음으로 양을 잡아 그 피로 집에 바른 것을 보셨을 때에, 하나님 측에서 어떠한 중대한 액션을 취할 것이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페싸흐를 할 것이다." 성경 모든 번역본에 보면,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갈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틀린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보았을 때에, 여기서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양을 잡아 그 피는 바르고, 결국 먹는데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을 잡아 피를 바른 것을 보셨을 때에, 하나님도 당신의 페싸흐를 이행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페싸흐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핵심 액션은 양을 잡아서 죽이는데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잡아 죽인 양의 피를 보시면, 그 때에 당신의 페싸흐 양이 죽임 당할 것, 즉 주님이 당신의 페싸흐를 이행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페싸흐 양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노예의 신분에서 값을 지불하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노예로서 양이나 염소를 희생하여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먹는다고 바로로부터 해방하여 절대로 자유인이 될 수 없다. 피를 바른 행위는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는다는 표적에 불과했다. 하나님 만이 당신의 페싸흐 양을 값으로 지불하셔서 주님의 구원을 믿는 자들을 구속하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페싸흐 식사를 먹으면서 (양고기라면 비주얼이 더욱 강화될 수도 있겠다.) 희생되신 하나님의 페싸흐 양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식사 후에 세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실 때에 바로 "구속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세 번째 "구속의 잔"을 두고 새로 갱신하시는 언약을 선포하셨다.
13. 구속의 잔 (The Cup of
Redemption)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쏟아 부으신 보혈로 인해서 우리는 노예의 신분, 곧 빗나가는 인생 (죄)의 노예된 것과 하나님과 분리된 죽음의 상태에서 구속 되었다.
누가복음 22:20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보레이 프리 하가펜. 아멘
포도나무의 과실을 창조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 감사함으로 세 번째 잔을 마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페싸흐 양으로 인해 구속되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아버지의 구속으로 인해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음을 기억한다.
14. The Afikomen ("아피코멘", 헬라어) = "I came" (내가 왔다.) = 페싸흐 양
사도행전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아피코멘 순서가 페싸흐 세데르 하가다에 없었으나, 예수님 이후로 이 아피코멘 순서가 세데르 하가다에 들어오게 된 연유는 엄청나게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 땅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게 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늘 날 모든 유대인들이 페싸흐 세데르를 하가다에 따라서 할 때에, 이 아피코멘 순서를 반드시 한다. 놀라운 것은, 이들은 왜 맛짜 3개를 사용하고 있는 지, 왜 하필이면 중간 맛짜를 반으로 부숴서 반쪽을 세마포에 싸서 숨겼다가 아이들로 하여금 만찬 순서 끝에 찾게 하는 지 등 예식은 따라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잘 모르고 있고,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오셨고, 인류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의 페싸흐 양으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으며, 장사되고 삼일 만에 아버지께서 부활시키셔서 승천하시고, 이제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세 번째 잔인 "구속의 잔"에 우리는 동참했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이라고 하시는 아피코멘 ("내가 왔다."), 찢겨지고 부숴진 맛짜에 동참하여 먹는다.
*** 아이들로 하여금 숨긴 아피코멘을 찾는 시간. 찾은 아이에게 10세켈 주기.
*** 이사야 53장을 인도자가 읽는다.
*** 다함께 누가복음 22:19를 읽는다:
누가복음 22:19 - 또 빵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바뤃 아타 아도나이 멜렣 하올람 하못찌 레헴 민 하아렛쯔. 아멘
땅에서 빵을 소산으로 주시는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 기도가 부활의 그림을 그려준다: 땅에서 생명의 빵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 모두 함께 우리의 페싸흐 양이 되신 예수님의 몸에 참여한다.
15.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취하실 결혼의 잔 (The Cup of Acceptance)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취하실 것이다. 그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포도주를 드시지 않을 것을 예수님은 선포하신다:
마가복음 14:25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페싸흐 양이 되셔야 하기 때문에, 죽으셔야 하기 때문에 네 번째 잔을 실제로 드실 수 없으셨다. 그러나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에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돌아와 너희를 나의 신부로 취하리라!" 네 번째 잔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면서 마신다.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페싸흐 양의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신부의 믿음의 잔인 것이다!
바뤃 아타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멜렣 하올람 보레이 프리 하가펜. 아멘
포도나무의 과실을 창조하신 온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아멘
*** 네 번째 잔 마시기.
16. Hallel (할렐) - 찬양
마가복음 14:26 -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 시편 113-118편을 읽는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것을 시편의 찬미로 준비하신다. 그러므로 시편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기도를 생각하자.
17. 엘리야 선지자를 기다림 (The Prophet Eliyahu)
*** 말라기 4:5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세데르 만찬에 항상 엘리야 선지자의 자리를 준비해 놓는다. 자녀로 하여금 엘리야 선지자가 문 앞에 왔는지 확인해 본다.)
*** "엘리야후 하나비" 노래 부르기
다 함께 선포: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샤나 하바아 비루샬라임!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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