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장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12장에서, 이집트에서의 거짓말로 인한 수치스런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똑같은 거짓말로 이제는 사라의 태중에 잉태하게 될 약속의 씨앗에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왜 그랬을까? 이제는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졌을 것이고, 진리와 자신들의 정체성에 뿌리를 깊이 내려 성숙했을 것인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 왜 똑같은 거짓말을 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아브라함은 왜 헤브론에서부터 이동하여 가나안 땅의 제 2의 곡창지대에 위치한 그랄에 들어가 체류할 생각을 했을까? 성경을 얼핏보면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 같다. 창세기 12장 애굽에서 일어난 사건과, 20장 그랄에서 일어난 사건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사건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20:1 아브라함이 그곳에서부터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카데스와 술 사이에 거하였고 그랄에서는 잠시 머물렀더라.
Q: 아브라함은 왜 헤브론에서 네게브 (남쪽) 지역으로 이동했을까?
유목민인 것은 사실인데... 그랄 지역은 왕이 있고, 아브라함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회"였을텐데, 왜 이 지역으로 궂이 이동한 것일까?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랄 지역으로 가라고 인도하셨다는 기록도 없다.
카데스와 술 사이, 그리고 그랄 지역은 이스라엘 지도를 살펴보면 브엘쉐바의 서북 지역이다. "텔 하로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지도 참조). 오늘날 "그랄 강"이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지나가다 보면 지명 표지판도 있다.
참고로 “그랄”은 히브리어로 "גרר"(가라르), “숙박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체류하다”를 히브리어로 보면, “그랄”과 같은 어근을 갖고 있다. 체류자, 또는 외국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르”이다 (같은 어근). 히브리어로 봐서는, 아브라함이 그랄로 간 것이, 창세기 12장에서 기근이 있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을 간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머무는, 체류하기 위해 갔었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족장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서 "보호 받는" 시민이 되었다 (창17:8, 창20:1, 창23:4). 그리고 20장의 끝을 보면,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그랄 왕으로부터 실제로 호의와 보호를 받게 된다. 이렇게 보호를 받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이 아직까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의 정복은 400여 년 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 일어나고, 또 광야에서의 훈련이 있은 후,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행하게 된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문제가 있어서 그랄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창13:14-17; 창15:18-21; 창17:8의 땅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와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한 것이 아닐까 하고 본다. 창13:17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보고, 눈에 보이는 대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일어나서 그 땅을 가로와 세로로 걸으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겠음이라.”라고 명령하셨었다. 또 창15:18 말씀에서는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씨에게 주었으니…”라고 하신다. 창17:8에서는 “내가 너와 네 씨에게 네가 타국인으로 있는 땅, 즉 가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며…”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두루 다니면서 한곳에 정착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가로와 세로로 걸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물론 성경에는 가나안 북쪽 지역을 두루 다녔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의 땅을 아브라함의 씨(후손)에게 주셨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정말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고, 이름을 이쯔학(이삭)이라고 부르라고까지 하셨다! 하나님의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 즈음 99세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곧 잉태하게 될 것이다. 아들을 곧 얻게될 100세가 된 아브라함은 이제 아들과 후손들을 생각해서 일어나 약속의 땅을 걷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헤브론에 오래동안 머물렀던 아브라함이, 임신할 아내를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는 남쪽을 향해서 이동했고, 카데스와 술 사이에 장막을 치면서 거주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블레셑이 나중에 차지 하게될 영토) 가나안 땅의 제 2의 곡창지대 지역의 중요한 도시, 그랄까지 간 것이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게 임했을 때 이집트로 피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이 많은 위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온 그 당시 아브람이었다. 기근? 기근이라고는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니... 심한 기근은 아브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 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20장에서 기록은 없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자기 멋대로 일어난 움직임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마치 약속의 땅을 정탐하러 다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그랄은 부유한 도시였었다. 나중에 블레셑 민족이 정착하게될 이쪽 비옥한 지역을 정탐하러, 그 당시 중요한 도시였던 그랄까지 간 것은 아니었을까? 그랄 도시의 사람들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경배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이 이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참으로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 (경외함)이 없기에…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왜 이 이야기를 말씀하고 계시는가?
시기적으로 보면 이삭이 탄생하기 직전인 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무엇인가? 단지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다시금 강조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넣으신건가? 상당히 중요한 메세지가 있기에 이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20:2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에 대해 말할 때 "그녀는 내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서 사라를 취하니라.
새 영토를 접근하고 그 안에서 체류하는 방법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어쨌든 전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거짓말.
말씀은 다시금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의 결혼언약 관계를 강조한다—“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내 누이라" 수법은 과거 이집트에서도 약속의 씨앗을 잉태할 아내 사라를 위험에 빠뜨리게 했었고, 이번에는 실제적인 잉태를 앞두고 매우 심각한 상태에 아내를 처하게 했다. 사라는 이제 곧 약속의 씨앗, 메시아 라인을 이루게 될 이삭을 잉태할 중대한 때에 있었는데 말이다.
[ 삼천포 ]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사라는 99세의 할머니였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랄의 왕으로 하여금 사라를 아내로 취하게 했을까? 사라는 분명 이삭을 임신하고 출산하기 위해 육체가 어느정도 소생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아무리 그래도... 사라는 할머니였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비멜렉은 사라를 아내로 취해서 당시 관습에 따르면, 그의 “하렘” (규방)에 두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박살이 날 수 있는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20:3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취한 여인으로 인하여 네가 죽은 사람이 되리니, 이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내임이라." 하시더라.
20:4 아비멜렉이 그녀에게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아뢰기를 "주여 주께서는 의로운 민족도 죽이시나이까?
20:5 그가 '그녀는 나의 누이라.'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이까? 그녀 자신도 말하기를 '그는 나의 오라비라.' 하였나이다. 나는 마음/생각의 온전함 (completeness)과 내 손의 무죄함 (blamelessness)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더라.
아비멜렉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4절 말씀을 보면, 아비멜렉 뿐만 아니라 지금 그랄 성에 있는 사람들도 (블레셑 민족인가?? 아직 블레셑 민족이 대거 가나안 해안지역을 침략하고 정복하여 이동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수의 무리가 미리 조금씩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고고학자/인류학자들은 보고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거짓말을 지적했고, 자신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줄 몰랐기 때문에 아내로 취했다고 (아마도 아브라함의 동의가 없이 한 것 같다—당시 왕들은 자기가 하고싶은 대로 행하였다) 항변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이방 왕 아비멜렉에게 어떻게 계시하시는가? 계속해서 말씀을 살펴보면...
20:6 또 하나님께서 꿈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정녕, 나는 네가 네 마음/생각의 온전함 속에서 이 일을 행한 줄 알았으므로, 나도 너를 막아 내게 죄를 짓지 않게 하였나니, 내가 너로 그녀에게 접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미 아비멜렉의 마음/생각이 온전(히브리어=톰=תם) 하다는 것을 “정녕” 알고 계셨고, 이를 그에게 알려주신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에게 알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꿈으로 그에게 은혜로 나타나셔서 그가 당신께 죄를 범하는 것을 막으셨다고 하신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거짓말하여 아비멜렉이 사라를 첩으로 취한 결과로 사라와 접촉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인가? 문제가 터지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거짓말한 대가가 아닌가?
아브라함이 사실을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타국인으로, 아비멜렉의 보호 아래 들어온 아브라함을 손쉽게 제거하고, 그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의 아내 사라를 취했을까? 그 당시 문화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지만...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엄중하게 다루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죽음이 임한 상태였다. 하나님이 7절에서 선지자인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으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죽을 병이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아비멜렉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거짓말을 했는데 왜 아비멜렉을 다루시는가? 그만큼 아브라함이 아내로 인해 자기 목숨을 두려워할 근거가 있었던 것일까?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무섭게 다루시는 것을 보면, 가능한 이야기다.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을 막으셨다고 하셨다. 어떠한 "죄"인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류를 회복시키시기 위한 구속계획이,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에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오리지널 디자인인 결혼을 파괴하는 행동 또한 문제였다 (물론 아비멜렉은 아내라는 사실을 몰랐었지만, 알았다고 해도 아마 더 큰 죄를 범하면서 취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곳"이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비멜렉에게 누가 주권자인지를 선언하신다.
20:7 그러므로 이제 그 사람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주라. 그는 선지자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여 네가 살 것이라. 그러나 네가 그녀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너는 알지니, 네가 분명히 죽을 것이며 너와 네게 속한 모든 자들이 죽으리라." 하시더라.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를 돌려주라고 명령하시고, 돌려주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죽을 것임을 엄포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연하게 나타내신다.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분… 그만큼 아비멜렉은 우상숭배자였고, 그 당시 왕들이 그랬듯이, 자기 자신을 신과 같은 주권자로 보았을 것이고, 이러한 "빗나감"의 결과로 공의가 무엇인지도 몰랐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다루셨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신다. 그는 선지자요, 그가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해야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언급한 대목이다. 아비멜렉이 쉽게 넘볼, 할아버지와 같은 약자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모든 말씀에서 우리가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추측한 것처럼,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경외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한, 폭군과 같은 통치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비멜렉을 철저하게 다루시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의 선지자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하신다.
또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 12:3b의 말씀의 성취이다: "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세상 모든 민족의 가족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받을 복은 무엇인가? 바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앗 "라인", 믿음의 계보에서 탄생하실 메시아 예슈아가 아닌가? 이 이야기를 얼핏 봤을 때에는 거짓말 문제의 재방송으로만 보기 쉬운데, 이집트로 갔었던 그 당시 아브람의 상황과는 달리, 이제는 아브라함과 사라로 인해서 이방 왕 우상숭배자 아비멜렉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꿈에서 만나고, 죽지않고 오히려 기도를 받아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임해 생명과 후손을 누리는 복을 받은 것 아닌가?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속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20:8 그러므로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의 모든 신하들을 불러 놓고 그들의 귀에다 이 모든 일들을 말하니 그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더라.
20:9 그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행하였느냐? 내가 네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네가 나와 내 왕국에 큰 죄를 가져왔느냐? 네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20:10 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엇을 보고 네가 이 일을 행하였더냐?" 하니
두려움에 가득찬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즉시 불러내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책망한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와 다르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도대체 왜 그랬는지, 무엇을 보았길래, 무엇 때문에…를 물어본다.
20:11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참으로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에 내 아내로 인하여 그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음이라.
20:12 또 그녀는 실로 내 누이라. 그녀는 내 어머니의 딸은 아니지만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내 아내가 되었도다.
20:13 하나님께서 나로 내 아버지 집을 떠나 유랑하게 하셨을 때 내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당신이 나에게 보여줄 친절 (헤세드=언약적 충실함)이라. 우리가 가는 어느 곳에서나 '그는 나의 오라비라.'고 하라 하였노라." 하더라.
아브라함의 이유:
(1) 그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에, 사라로 인해 아브라함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사라는 실제로 아브라함의 누이다 (같은 아버지, 배다른 어머니의 딸로 결혼함);
(3)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부르셨을 때부터 이 전략을 사용하기로 했었다. 서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이것이 서로를 향한 미성숙한 "결혼언약의 충실함" (=헤세드)이었다.
전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았을 때, 아비멜렉을 향해 미안한 마음이나 잘못했다는 느낌이... 없다. 창세기 12장 이집트에서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창12:14-16 말씀을 보면, 이집트인들과 바로의 각료들은 모두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칭찬했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녀를 바로에게로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바로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오라비인 아브람 (아직 아브라함이 아니었다)에게 막대한 선물도 주고, 아주 잘 대접하기도 했다. 그 당시 아브람이 살아남기 위해 생각하고 계산한 전략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람은 그저 자신이 죽는 것이 두려워 아내 사라이를 위기해 처하게 했었다. 바로의 반응을 기억해 보자. 바로가 사라이로 인해 주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았을 때에, 몹시 노한 가운데서 아브람을 좇아버렸다. 호위대의 에스코트까지 받아가면서 아브람과 가족은 이집트에서 좇겨났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매우 유사하지만,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 별 설명 없이 그는 사라를 취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부를 보고서 그렇게 했을 지도 모른다 (?). 분노한 바로와는 너무도 달리,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이 말한 이유들에 군소리 없이 동의한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의 두려움에는 근거가 있었음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그가 말한 이유들은 아비멜렉에게 충분했다. 그리고 상태는 시급했다. 지금 그는 죽음이 임한 상태였고, 아브라함이 기도해 줘야만 살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다.
20: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남종들과 여종들을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주며
20:15 아비멜렉이 말하기를 "보라,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좋아하는 곳에서 거하라." 하고
20:16 사라에게 말하기를 "보라, 내가 네 오라비에게 은 천 개를 주었노라. 보라, 그는 너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네 눈(수치)의 가리움이라."하였으니, 이같이 그녀가 책망받았더라(=결백함이 입증되었더라).
여기서 상황이 창세기 12장 이집트와 다르다는 것을 확고하게 알 수 있는 아비멜렉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아비멜렉은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그에 동의했으며, 그 싸인으로 아브라함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사라에게는 그녀의 수치를 덮고, 또 결백함을 모두에게 입증하기 위해 은 천개를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더 나아가 15절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정탐하기 위해 그랄 영토로 들어왔는데, 결국 “보라,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좋아하는 곳에서 거하라”는 초청 및 아비멜렉의 전적인 보호함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 이삭이 탄생하고, 이 아기를 잘 보호하면서 키우도록 이러한 보호막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20:17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유해 주시므로 그들이 아이들을 낳았더라.
20:18 이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주께서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를 벌써 닫으셨기 때문이라.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을 두고 어떻게 기도했을까? 그랄 왕 아비멜렉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나의 선지자"라고 증언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제서야 치유가 일어날 것을 간증으로 들었을 것인데, 이 상황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하며 기도했을까? 그 당시 기도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가 올려졌을 때에,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죽을 병(?)에서부터 치유해 주셨고, 또 그의 아내와 여종들의 닫혀졌던 모든 태를 열어주심으로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 사건 이후로 아이들을 낳았을 때에, 그 전과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도 달랐을 것 같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선지자로 인해서 치유받아 다시 열려진 태로 마치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새롭게 다음 세대가 태어났을 때에, 이 간증이 아이들에게 새겨졌을 것 같다.
놀라운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분리" 안에서 죽은 인생을 살았던 그랄 땅 왕족과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인류회복의 역사의 시작점인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다시 창조주를 만날 수 있었고, 왕은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치유 받아 "거듭났으며", 또 죽어있던 태가 치유받고 "거듭나서" 새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이 "구속과 구원"의 그림은 정말 놀랍다.
창세기 20장의 이야기는 12장과 매우 유사하지만, 똑같은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똑같은 차원으로 두 번 다룬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의 경우와 같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약속의 땅을 떠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속의 아들을 임신할 아내와 함께 위임 받은 땅을 정탐하기 위해 그랄 (미래의 블레셑) 영역까지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확하게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아비멜렉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 앞에서 분명 무언가 바로 서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위기에 개입하셨고, 12장에서 바로를 다루심과는 달리, 아비멜렉을 엄중하게 다루셨고, 그 내용을 분명하게 기록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선지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임을 또한 그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1 Comments
창20을 전에 전혀 보지못했던 다른 관점으로 보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으며 새롭게 묵상하고 말씀공부하는게 넘 재미있어요!!👍
ReplyDelete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