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생명의 때에 따라서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것이라고 하시고, 곧바로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을 연결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일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요단 평지를 선택하는 장면을 이야기 하시면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임할 멸망에 대해서 창세기 13:10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셨었다. 말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젠가 이 멸망 이야기가 있을 것을 염두에 두라고 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두 이야기를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 이쯔학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과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실 것을 아브라함과 나누시는 장면) 연결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전혀 상관 없는 두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중대한 메세지가 있기에 이렇게 일부러 연속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메세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13:10의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이야기 배경: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다투기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내가 부탁하노니, 나에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갈 것이요, 또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하니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의 온 평지를 바라보니 어느 곳이나 물이 넉넉하더라. 그곳은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으니, 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아 마치 소알에 온 것 같더라.
13:11 그리하여 롯이 요단의 온 평지를 택하고 롯이 동쪽으로 (미케뎀) 옮겨가니, 그들이 서로에게서 갈라서더라.
13:12 아브람은 카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의 성읍들에 거하였는데, 그는 자기 장막을 소돔을 향해서 쳤더라.
13:13 그러나 소돔인들은 사악하였고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위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는 것을 새롭게 하는" 땅으로 가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었다. 그러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 즉 우상숭배, 인간 문화/문명의 메소포타미아에서 형성된 "아브람", 창조된 본질과 한없이 빗나가고 벗어난 정체성의 뿌리를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이에 롯도 할아버지 데라와 함께 떠났었고, 하란에서 멈추었다가 아브람과 함께 위대한 인간문명과는 거리가 먼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가나안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심한 기근이 임하여 아브람은 롯을 포함한 온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이동했었었다. 인간의 위대한 다른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로 갔던 것이다. 아브람은 이곳에서 사라가 자기의 누이라고 해서 어려움을 겪은 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벧엘에서 세웠던 제단을 다시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 모든 가족들에게 복을 가져다 줄 "아버지" 아브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인간문명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하나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한 것 같다.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다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지 않을 것을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과는 달리, 조카 롯이 보는 관점은 과거와 변함없이 여전했다. 하나님께서 이를 창세기 13:10 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계신다: "...롯이 눈을 들어....바라보니...그곳은...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아..." 롯은 이집트를 경험했었을 때에 너무도 좋게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의 동산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롯이 생각하는 "에덴", 하나님 안에 있는 이 기쁨 동산은, 이집트 땅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요단 평지를 바라보았을 때에 물이 많아 좋게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 지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음을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다...
롯의 관점, 롯이 보는 "눈", 롯의 생각나무/사고체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에, 창세기 13:11에서는 더욱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롯의 움직임이 하나님께는 무엇을 뜻하고 있는 지를 증언하고 있다: "롯이 동쪽으로 옮겨가니, 그들이 서로에게서 갈라서더라." 여기서 "동쪽으로"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를 보면, "미 케뎀"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 케뎀"은 창세기 2:8에서 살펴 보았듯이, "태초 전서부터"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롯의 움직임을 이야기 할 때에 "미 케뎀"이라는 표현을 왜 하나님께서는 사용하고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마치 롯이 "태초 전서부터"의 기쁨 동산의 현실, 진리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마치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 너무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움직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케뎀"이라는 표현을 하고 계신다 (창세기 4:16 - "카인이 주 앞에서 (문자적으로 "주의 얼굴을") 떠나가서 에덴의 동쪽 (태초 전 기쁨) 놋 (유리방황) 땅에 거하였더라."). 마치 태초 전 기쁨, 주의 얼굴을 떠나가 유리방황하는 그림을 그리시는 것 같다. 바벨 탑의 이야기를 말씀하실 때에도 "미 케뎀"이라고 하신다 (창세기 11:1-4):
11:1 온 땅에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만 있더라. 2 그들이 동쪽으로부터 (태초 전서부터) 여행을 하여 시날 땅에서 평원을 만나니 거기에서 거하였더라. 3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가서 벽돌을 만들어 단단하게 굽자." 하고 그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회반죽을 대신하였으며 4 또 그들이 말하기를 "가서 우리를 위하여 도성과 탑을 세우되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자. 그리하여 우리가 온 지면에 멀리 흩어지지 않게 하자." 하더라.
여기서도 그림이 비슷하다. 태초 전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인류가 마땅히 거할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 동산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빗나간 생각에 입각한 빗나간 행동.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아브람은 이 언약이 말하고 있는 약속의 땅을 이집트 이후부터는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 롯이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절대로 아브람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롯이 아브람과 갈라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모든 생각과 관점이 "태초 전서부터"의 진리, 현실과는 상관없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바로 "태초 전서부터"의 모든 것에서 갈라져 나온 움직임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창조주께서는 "태초 전서부터"의 모든 것으로 인류를 회복시키고자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어둠에서 불러내신 것인데...
창조주를 창조주로 보지 못하여 결국 자신이 어떤 존재인 지도 모르고, 진리가 무엇인 지 구분도 안되고 분별도 안되는 롯에게는, 결국 소돔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끌려서 점점 자기의 장막을 근처로, 근처로 옮겨간 것 같다. 이 매력적인 도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창세기 13:12 - "그러나 소돔인들은 사악하였고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
하나님과 두 천사 (처음에는 "세 사람"으로 표현되었었다)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생명의 때에 따라서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하나님 나라, 빛의 역사의 시작을 이루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완전히 대조되는 소돔과 고모라, 극심한 어둠의 왕국의 결말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 주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회색 지대"는 없다. 빛과 어둠 중 택일해야 한다. 이 선택은 창조주 하나님도,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해 줄 수 없다. 이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매일매일 끊임없이 내가 선택하면서 성령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 하나님께서 열국의 아비, 모든 열방의 가족들에게 복이 될 아브라함 (18절)에게도 이 진리와 현실에 대해서 교육하시는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더니 소돔 쪽을 바라보더라.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려고 그들과 함께 나가니라.
18:17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18 아브라함은 분명히 위대하고 막강한 민족이 될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의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
18:19 내가 그를 아나니, 그가 자기 자식들과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명하겠고 그들은 주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는 주가 아브라함에 대해 말했던 바를 그에게 가져오려(이루게) 함이라." 하시니라.
[ 참고 ] Torah Resource Institute의 창시자이자 교수이신 팀 헤그의 코멘트 (한글 썸머리):
"내가 그를 아나니"에서 "안다"는 히브리어로 "야다" (ידע)이다. 여기서 "안다"라고 하셨을 때에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부부가 성관계를 했을 때에도 "야다" 동사를 사용한다), 사실 더 나아가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야다"는 언약적 언어이다. 삼하 7:20에서도 다윗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언약적 표현은, 예레미야서 31:34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언약"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을 안다"의 의미는, 언약을 맺으신 주님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충성을 다함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 바친다"는 어떠한 실질적인 모습인가? 바로 언약의 모든 약정 (하나님의 말씀, 명령 모두)을 충실하게 삶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내 코멘트:
Q: 하나님의 언약의 모든 약정을 충실하게 삶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일까?
(1) 가장 우선적으로 창조된 본질, 즉 내가 어떠한 존재로 창조되었는 지, 창조주의 인류를 향한 오리지널 디자인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그리고 타락 이후에 예수님의 다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내가 다시 창조된 본질 그대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고 (새 피조물), 그 본질 그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서 알아가면서 실제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충실한 삶"을 살게 되리라.
The use of the verb "to
know" in ancient near eastern treaties and covenants is well established,
and when HaShem states that He has "known" Abraham, it clearly is
covenant language, i.e., that the Almighty had entered into a covenant
relationship with him. We see a similar use of the verb ידע in 2Sam 7:20.
"Again what more can David say
to You? For You know Your servant, O Lord GOD!"
וּמַה־יּוֹסִיף דָּוִד עוֹד לְדַבֵּר אֵלֶיךָ וְאַתָּה יָדַעְתָּ
אֶת־עַבְדְּךָ אֲדֹנָי יְהוִה׃
This covenant use of the word
"know" (ידע)
has bearing on understanding Jer 31:34 and the conclusion of the "new
covenant" promise:
“They will not teach again, each man
his neighbor and each man his brother, saying, ‘Know the LORD,’ for they will
all know Me, from the least of them to the greatest of them,” declares the
LORD, “for I will forgive their iniquity, and their sin I will remember no
more.”
וְלֹא יְלַמְּדוּ עוֹד אִישׁ אֶת־רֵעֵהוּ וְאִישׁ
אֶת־אָחִיו לֵאמֹר דְּעוּ אֶת־יְהוָה כִּי־כוּלָּם יֵדְעוּ אוֹתִי לְמִקְטַנָּם
וְעַד־גְּדוֹלָם נְאֻם־יְהוָה כִּי אֶסְלַח לַעֲוֹנָם וּלְחַטָּאתָם לֹא
אֶזְכָּר־עוֹד׃ס
Here, in the new covenant, to
"know the יהוה"
means "to be loyal to Him as the covenant maker and thus to be loyal to
the covenant stipulations," i.e., to be faithful covenant members.
19절에서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어떠한 사람인 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우수하고 위대하고 준수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명령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서 "할 수 있었다"가 아니라, 아브라함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맺으셨고, 이 언약에 따라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회복시키셨기 때문에 "주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 그 정체성과 디자인 그대로 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디자인이 무엇인 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래서 말씀의 계시로 다시금 알아가도록 하신 것이 놀라우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언약을 통해 이제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서, 하나님 안으로 회복되어진 새 피조물로서, 그분의 얼굴 만을 바라보며 창조된 본질로 다시 걸음마를 시작했다 (엘 샤다이). 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언약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내가 비로소 창조된 디자인과 본질에 걸맞게 나의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식들과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명하겠고 그들은 주의 도를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 아브라함이 창조주의 도를 삶으로 살아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명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모본이 되고, 이런 식으로 주의 도를 보존하여 지킬 것을 아셨으며, 이러한 삶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말씀하시니... 윗 물과 아랫 물의 디자인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신다.
아브라함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주 하나님 아버지가 자비로우시고 은혜가 충만하시고 covenant faithfulness (헤세드=חסד)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며, 탁월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내가 그를 아나니 (언약을 맺으셨으니)...이는 주가 아브라함에 대해 말했던 바를 그에게 가져오려(이루게) 함이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이 해야 하는 것은 선택. 아브라함의 선택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어떠한 존재인 지를 그의 선택 (쉐마)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내가 진정한 "나"가 누구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보고 알아가면서, 이러한 "나"를 매일 매순간마다 선택해서 살면, 창조된 디자인 그대로 내가 나타나게 되어있고, 결국 새 피조물인 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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