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장 1부 - 1절에서 15절까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관계의 여정은 점점 더 절정을 향해서 가고 있다. 이제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브람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고, 하나님 얼굴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여정을 시작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 자들로, 이제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얼굴과 공의, 창조주를 잃어버린 어두운 세상에 반영하는 "아랫 물"이 되었다 (창 1:6; 롬
1:20).
이렇게 하나님 안의 기쁨 동산 안으로 회복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다음 세대/후손의 언약을 실제로 이루신다!
18:1 주께서 마므레의 (테레빈 나무 곁)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더라. 그가 그 날 더울 때에 장막 문에 앉았다가
이야기의 시작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2절에 나오는 "세 사람"이지만, 이 "세 사람" 중 한 분은 주님이심을 시작부터 확실하게 알려주신다.
18:2 눈을 들어 보았더니, 보라, 세 사람이 자기 곁에 서 있더라. 그가 그들을 보자, 장막 문에서 뛰어나가 그들을 맞으며 몸을 땅에 굽혀 절하고
성경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는 무려 4번이나 하나님께서는 이 표현을 사용하신다: "눈을 들어 보았더니." 가장 먼저 이 표현이 등장하는 곳은 창13:14 이다. 아브람과 롯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눈을 들어 보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전에 롯도 스스로 "눈을 들어 보았다" (창 13:10). 그러나 그가 본 것은 그의 생각하고 믿는 바 그대로를 보았다. 철저히 롯의 사고체계에 따라서 본 것이다 (롯에게는 하나님의 동산 = 이집트 였다!). 대조적으로 롯과는 완전히 다르게,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눈을 들어서 보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계시해 주실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브람은 아브람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움직이던 메소포타미아/갈대아 우르, 우상숭배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사람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그림자로, 아랫 물로 움직이고 반영하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회복된 존재로 변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 표현은 바로 이곳, 18장 2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구체적으로 지키실 것을 이행하시는 장면이기 때문에 "계시"가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브라함은 준비 되었다. 그래서 눈을 들어서 보았을 때에, "세 사람"을 본 것이다. 읽었을 때에 얼핏 물리적으로 3명의 사람을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 이상으로 무언인가를 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반응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18:3 말하기를 "내 주여, 내가 이제 주가 보시기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간구하오니, 주의 종에게서 지나쳐 가지 마소서.
여기서 아브라함이 "내 주여"하고 손님을 불렀었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다. "아도나이"는 손님에게 사용하는 존칭이고, 아브라함은 마땅히 이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전반적인 반응은 당시 문화권에서 손님에게 하는 접대문화에 따라서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2절에서 말씀해 주고 계신다.
18:4 내가 간구하오니,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18:5 내가 빵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생각(마음)을 강하게 (위로)하신 후에 길을 계속 가소서. 이는 당신들께서 당신들의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네가 말한 대로 그리하라." 하더라.
18: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가서 말하기를 "고운 가루 세 되를 속히 가져다가 반죽을 하여 화덕 위에다 과자를 구우라." 하고
18:7 아브라함은 소떼에게로 달려가서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와 청년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잡아 요리하더라.
18:8 아브라함이 요거트(버터)와 우유와 그 사람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서 그들 곁에 서니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은 최고의 대접을 이 "세 사람"에게 베풀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짐작한 것이 있었을까?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더라도, 그는 분명히 "눈을 들어 보았다." 그래서 깍듯이 대접하고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18: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하니 그가 말하기를 "보소서, 장막 안에 있나이다." 하더라.
대접을 받은 "세 사람." 이제 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입을 열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을 것을 들었다 (창 17:15-19). 아들의 이름이 "이쯔학"이라는 것까지도 이미 받은 말씀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질문은 "언제"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이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인가?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했을 때에 아브라함의 가슴이 철렁했을까? 하나님의 은혜로 분명 눈을 들어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이 질문에 심장 맥박이 엄청 빨리 뛰기 시작했을 것 같다! 아브라함이 무언가를 기대했음에 힌트를 주는 표현이 바로 "히네이"--"보소서"인 것 같다. 마치 기다렸듯이...
18:1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명의 때를 따라 분명히 네게로 돌아오리니, 보라,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가질 것이니라." 하시니, 사라가 그의 뒤에 있는 장막 문에서 그 말을 들었더라.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절에서는 "주께서"로 시작했다가, 2절에서는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는데, 이제는 분명하게 한 사람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내용을 보면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선포하신다!
히브리어로 보면, "내가 생명의 때를 따라"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번역본을 보면 "내년 이맘때에"라고 했으나, "생명의 때를 따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주관자요,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주관자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가질 것을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입에서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히브리어로, "분명히 네게로 돌아오리니"는 "네게로 돌아오는데 돌아올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동사를 두번 사용했을 때에는 강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돌아오셔서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18: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를 많이 먹어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인들의 관례도 끝났으므로
18:12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나의 주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더라.
17장에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었다 (창 17:17). 여기서 사라도 말씀을 듣고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사라와 아브라함의 웃음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음을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라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동기와 태도로 웃었기에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거짓말이 툭 튀어 나왔을까?
말씀을 보면서 형성된 내 생각이요, 나의 제안이다:
사라는 나의 주 (남편)가 늙었으니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웃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냥 웃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 "즐거움"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어근은 "에덴"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기쁨, 환희를 뜻한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는 성적인 즐거움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라는, '내 남편이 늙었으니 성적 즐거움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18:13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며 말하기를 '늙은 내가 아이를 낳는다니 이 일이 확실한가?' 하느냐?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주 하나님은 정말...참 긍휼하시다. 사라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지 않으시고 두리뭉실 말씀하시니 말이다!
18:14 주께 너무 어려워서 못할 일이 있겠느냐?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정해진 기간에 네게 돌아오리니 사라가 아들을 가지리라." 하시니
다시 한번 선포하신다: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정해진 기간에 네게 돌아오리니..."
정해진 기간은 히브리어로 "모에드"이다. 레위기 23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절기"를 말씀하실 때에 같은 단어를 쓰신다: "모에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 정하신 때를 말씀하실 때에 "모에드"를 사용하시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시는 때를 가리켜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이 정해진 때에 돌아오셔서 역사하실 것을 선언하신다.
18:15 그때에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며 말하기를 "내가 웃지 않았나이다."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사라가 웃었을 때에도 "이쯔학"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사라가 기적의 아들이 태어난 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고, 무엇을 기억했을까? 본인의 믿음 없음을 기억하기도 하고, 생각의 동기와 내면의 태도를 모두 다 아시는 주 하나님을 기억하기도 하며, 이러한 빗나간 동기를 지적하시지만 긍휼히 다루셔서 바른 길, 바른 관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또한 기억하면서 기쁨의 웃음으로 가득차지 않았을까 싶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라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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