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7장
- "엘
샤다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시다.
-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을
다시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과
영원히
이
언약을
맺으셨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신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그리고
그의
대대
후손과
함께
맺으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신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자신과
아들
이스마엘을
포함한
온
집안
남자들에게
할례를
한다.
이쯔학 (이삭)이 잉태하여 탄생하기 1년 전. 아브람은 99세, 사라이는 89세. 이스마엘이 태어난지 13년이 지났다. 이 때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신다. 이 만남에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시면서 구체적으로 아브람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 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소개하신 이름을 통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거듭남인 것과 같이, 아브람에게도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심을 보는 것 같다. 이 거듭남 없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씨가 될 이쯔학이 나올 수 없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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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KJV >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엘 샤다이 (=전능한 하나님)라. 내 앞에서 행하라. 그리고 너는 완전하라.
"엘 샤다이"
창세기 17장 1절 -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ZX4l23eh2hk&feature=youtu.be
창세기 17장 1절 - 2부
https://youtu.be/YXIAKDXzUX8
문자적으로 1절을 히브리어에서 번역하면: "나는 가슴의 하나님이라. 내 얼굴에서 걸어 너는 온전/완전하라."
비디오와 비디오에서 나오는 그림을 통해 갓난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서 자아상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았고, 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아브람에게 창조주의 얼굴이 바로 "거듭난" 아브람의 거울이 된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걸어라"라고 하실 때에, 이제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신생아로, 75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우상숭배의 문화권에서, 다름 아닌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형성되고 배워온 아브람의 빗나간 정체성을 이제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 바라보며 걸음마를 새롭게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과 같다. 이러한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 보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기 때문에 온전한 (새 피조물) 존재이기에, 이 새로운 정체성대로 살라고 하신다고 보는 것이 적합한 것 같다. 히브리어로 "완전"이라는 단어는 "tamim/타밈"이다. 문자적으로 아무런 흠이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 거듭났을 때에, 50% 과거의 죄 덩어리인 이용선이, 새로운 50%의 이용선과 결합하여 100%를 이루고 있다고 절대 생각할 수 없다. 말씀의 진리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분명한 진리를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여기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라고 하셨을 때에는, "너는 타밈=온전=흠이 없다"라고 하시는 것과 같지 않은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우리. 이제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형상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버지가 된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 우리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가장 먼저 이 "걸음마"를 하나님 얼굴 앞에서 걸어야 했고, 그는 실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살았고, 그분과 함께 걸었으며, 지금도 걷고 있다.
17:2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내 언약을 세우며, 너를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17:3 아브람이 주의 면전에 엎드리더라.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17:4 "보라, 내가 너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노니,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리라.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지구의 모든 가족들의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새롭게 변화시키신다..."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리라."
17:5 네 이름을 더이상 아브람이라 부르지 않고 네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게 하였음이라.
히브리 글자에서 "ה" (헤이; 한글의 "ㅎ" 또는 영어의 "h"와 같은 소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뜻한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의 발음을 역사적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절대로 나름 생각대로 읽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추정해서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 같은 경우, 하나님의 이름 "יהוה"의 발음을 추정해서 "여호와" 또는 "야웨"라고 하던지, 아니면 "주"라고 한다. 왜냐하면 영어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LORD로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이름을 계시해서 인류에게 알려주신 이름이 바로 "יהוה"이다. 여기서 자세해 보면, "ה"라는 글자가 두번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할 수 없기 때문에, 줄여서 표기할 때에 바로 이 "ה"라는 글자를 홀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헤이" 글자는 마치 하나님의 숨결을 상징하기도 한다: 입으로 "후"불 수 있는 것이 숨--하나님의 숨결--"헤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하나님께서 바꿔주신데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그대로, 이름의 뜻에 변화가 "열국의 아비"로 바뀌어서 아브라함이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숨결, 생명을 지니게 된, 거듭난 아브라함이 되었기 때문에도 아브라함이 되었다. 이름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시는 사건이 손꼽아 몇번 일어난다. 이는 새 이름을 받게 된 사람에게 어떠한 대대적인 정체성의 변화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예: 아브람 --> 아브라함; 사라이 --> 사라; 야곱 --> 이스라엘 등).
17:6 내가 너를 심히 다산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을 이루며, 네게서 왕들이 나오게 하리라.
17:7 내가 나와 너와 네 씨 사이에 대대로 내 언약을 세우리니,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씨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전에도 15장에서 보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늘의 별들 만큼이나 많은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또 이 후손들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거주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17장에서는 대대로 맺어지는 영원한 언약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이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언약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덧붙여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관계이다--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맺게 되는 언약 관계. 언약을 맺은 관계 안에서는 반드시 서로서로 마땅히 따라야 할 약속이 있다. 생명의 관계, 사랑이 중심이 되는 언약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서로 특정한 언약을 따르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에 와서 한가지 관찰한 것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 언약관계에 대해서나 언약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언약을 통해서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언약에 대해서나, 언약 개념이 거의 없고, 주로 계약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쪽은 바로 크리스천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언약은 고대근동에서 주로 왕/주와 백성 사이에서 맺었다. 임금님이 없는 요즘 세상에서 왕과 왕국과 왕의 백성에 대한 개념이 약할 수밖에 없으니, 언약에 대한 생각도 그러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이 언약 관계가 너무도 중요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개인과 맺는 부분도 있지만, "너와 네 씨 사이에 대대로...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씨의 하나님이 되리라"라는 대대로 이어지는 영원성과, 이 백성에게는 신이 이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민족의 영원한 신은 "יהוה"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영원한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 다른 신은 절대로 허용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열방인 나는 어떠한가? 예슈아 메시아의 다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와 부활을 통해 나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되었고,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나에게도 적용되었으며, 나도 참 올리브 나무인 이스라엘에 접붙여졌으니, 나의 하나님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고, 다른 신은 절대로 허용하실 수가 없으시다. 이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왕이자 창조주의 형상을 지닌 나는 오직 나의 창조주의 얼굴과 이름을 나의 삶과 말과 태도와 행동으로 반영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 나를 다시 그분 안으로 돌이켜 주셨고, 나를 새 피조물로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원래 인류가 지녔던 목적대로 사는 것이 합당하고 마땅하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나의 삶과 말과 태도와 행동과 관계를 통해서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면서 하나님의 얼굴과 이름과 나라의 invisible한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visible하게 나타나는 것!
이러한 과정이 하나님이 언약 관계를 통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모습이 아닐까?
17:8 내가 너와 네 씨에게 네가 타국인으로 있는 땅, 즉 카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관계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구체적인 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따라 살면서 빛이신 하나님을 열방에 반영하고 증거할 것인가, 아니면 이 장소에서 열방과 똑같이 흑암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을 것인가? 약속의 땅에서 열방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열방보다 더 사악한 어둠으로 타락할 것인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씨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말씀은 열방의, 인류의 회복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전 지구와 인류의 회복을 염두에 두시고 이루시는 이 놀라운 언약관계를 나는 과연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가?
17:9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너와 네 씨도 대대로 지키라.
여기서 "지키다"라는 히브리 동사는 "שמר" (쇼메르=지키다; 보호하다=guard)이다. 신호등, 안전수칙, 법 등을 지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창조주가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내가 창조된 의도대로 살게 된다는 의미이고, 이를 다르게 말하면 생명을 지닌 자로 산다는 의미이다. 창조된 의도대로 살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의도대로 사는 것은, 바로 창조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언약을 지키는 이유는 언약 관계가 있어서 당연히 그 언약 안에서 사는 것 뿐이다. 율법을 지키는 차원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때를 지나 한 참 후, 약속의 땅을 코 앞에 두고 모세가 광야 세대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모든 토라를 가르쳤다 (신명기). 그리고 끝으로 이렇게 말한다:
신명기 32:46-47
그가(모세)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너희 가운데 증거하는 모든 말씀에 너희 생각을 두고, 너희는 너희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 토라(=가르침; 지시사항)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임이라. 이 일을 통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하는 그 땅에서 너희의 날들이 길어지리라." 하더라.
17:10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네 씨 사이에 맺은 네가 지켜야 할 나의 언약이니 '너희 가운데 모든 사내 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 언약관계를 추상적인 약속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언약의 표징을 주신다. 이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실제로 몸에 이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늘 기억하도록 할례 받은 자에게 '기억 도우미'로 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심은 놀랍다! 그런데... 어떻게 도우미 역할을 하는가? 할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17:11 너희는 너희의 포피의 살을 베어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니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영원히 맺으신 언약의 표는 할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께서 개시하신 영원한 언약을 말해주는 "브맅 밀라"--할례의 언약이다.
할례의 의의는 무엇인가?
(1) 대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을 실질적으로 보여주시고 기억하게 하셨다.
남자 성기의 포피의 살을 베어내게 하셨다는 것은 적나라하게 실질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창조주께서는 아브라함하고만 언약을 맺으신 것 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 영원히 언약을 맺으셨음을 말씀하셨고, 15장에서 당신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개시하셨음을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다. 후손을 말할 때에, 창조주께서는 실제로 생식기관인 성기를 통해서 다음 세대가 이어지도록 디자인하셨다. 온 우주만물과 인류의 창조주-디자이너로서 남자의 생식기에 언약의 표를 두심으로, 이 약속은 대대로 반드시 이루어고 보존될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선포하심을 볼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
(2) 죽음, 거듭남, 그리고 베어버림 (할례)의 상징
로마서 6장을 보면 우리는 예슈아 메시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예슈아께서도 십자 처형을 살아낼 수 없으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완전히 처형 당해 죽었음을 말하고 있고, 또 침수 예식 (침례 - 사도 바울은 미크바 예식과 연결하고 있음)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연결지어 가르치고 있다 :
***6:3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6:4a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받은 침례에 의하여 죽음 안으로 장사되었으니...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요, 결국 죽음 안으로 장사된 후에 예슈아와 함께 부활시키셔서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는 것 ("생명의 새로움")이 하나님의 목표임을 사도 바울이 또한 말해주고 있다 :
***6:4b...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전에 존재하던 이용선은 예슈아와 함께 나무에서 처형되어서 "옛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존재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게 역사하신 이유는, "...죄의 몸을 멸하여 더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예슈아와 함께 새로이 탄생해서 새 피조물이 된 이용선은 완전한 새 피조물이다. "누구든지 메시아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후 5:17).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모양으로 함께 심겨졌다면 또한 그의 부활하심의 모양과 같이 되리라. 6: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침례/미크바를 통해서 이 진리를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생각 (마음)의 할례"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레브"는 "생각"을 의미하고 있다)를 통해서, 이 "죄의 몸"은 베어 버려져서 (포피의 살) 새 피조물이 나와는 연관이 없음을 또한 매일매일 기억하도록 연결시켜 주고 계신다. 남자로서 생식기는 매일 수차례 바라보게 되어있다. 이렇게 매일 수차례 바라보면서 나는 예슈아 안에서 완전한 새 피조물이 되었고, 또 아브라함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 나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음을 기억하게 하신 것이다! 너무도 실질적이신 하나님!
구체적으로...새 피조물로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생각의 할례를 받았고, 새로운 마인드로 나의 모든 생각을 매일 매순간마다 새롭게 함으로 (롬 12:2), 나는 정말 내 생각을 다하고 내 "네페쉬 하야" (=총체적인 존재와 인생)를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신명기 30:6 주 너의 하나님께서는 네 생각과 네 자손의 생각에 할례를 베푸시어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어 너로 살게 하실 것이요
***골로새서 2:11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버린 것이라. 2:12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2:13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리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셨으니
만약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언약의 표로 주신 "할례의 언약"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면, 내가 예슈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진리와 사실이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의 그림을 처음서부터 그려주심으로 인해서 예슈아 안에서 일어난 "생각의 할례"는 실제 할례를 통해서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있게 하셨다. 탁월하신 하나님 아버지!
17:12 대대로 모든 사내 아이는 집에서 태어났거나 네 씨가 아니고 타국인에게서 돈으로 샀어도, 난 지 팔 일이 되면 너희 가운데서 할례를 받아야 하느니라.
17:13 네 집에서 태어난 자든지 네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만 하리니, 내 언약이 영원한 언약이 되어 너희 살에 있을 것이라.
대대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의 표로...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내 아이, 곧 그의 포피의 살을 베어내지 아니한 자는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위반하였음이라." 하시더라.
17:15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래라 부르지 말지니, 사라가 그녀의 이름이 되리라.
17:16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그녀로부터 네게 한 아들을 주며,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그녀로 민족들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백성의 왕들이 그녀에게서 나오리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라이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셨다.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변화가 사라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라의 이름에도 하나님이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שרה - 아브라함과 똑같이 사라의 이름에도 "ה"--당신을 넣으셨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사라도 동일하게 변화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 바로 "거듭남", 샤마임(heavens)에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엘 샤다이"의 그림을 그려주고 계시고, 이름의 변화에 하나님이 계심을 말씀해주고 계신다. 더 나아가 언약의 상징인 할례를 그림에 더하시면서 더 많은 것을 말씀해 주신다. 이전의 "나"는 죽었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탄생했으며, 이전의 육은 잘라버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모두 "언약"이라는 한 사건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다.
17:17 아브라함이 주의 면전에 엎드린 채 웃으며(=이쯔학) 그의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백 세가 된 사람에게 아들이 태어날 수 있으리요? 구십 살이 된 사라가 애를 낳을 수 있으리요?' 하고
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서 살게 해 주소서!" 하더라.
아브라함은 아직도 이해를 못한다. 왜냐하면 사라가 임신하여 아기를 출산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차원의 생각에서 자신의 아들은 이스마엘이기 때문에, 이렇게 호소하는 것 뿐.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7:1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 사라가 참으로 네게 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 너는 그의 이름을 이쯔학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그의 씨에게 내 언약을 세우리니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과 결혼의 언약을 맺은 아내는 사라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 (에하드)이기 때문에 (창 2:21-25), 이 에하드에서 잉태하고 탄생하는 아들 이쯔학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는 것이 아닌가!
"아들의 이름을 이쯔학이라 하라." - 아브라함이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게 되는 동시에 진정한 기쁨의 웃음이 있을 것이기에... (이름 부를 때마다 창피해 하는 것이 아닌...은혜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자식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기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더욱 더 신뢰하게 되는 하나님 플라스, 플라스, 플라스!)
17:20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내가 너를 들었나니, 보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었으니 내가 그를 다산케 하며 크게 번성케 하리라. 그가 열두 통치자를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스마엘과 이쯔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것인가? 차이 점은 바로 언약에 있다. 하나님은 분명 이쯔학과 그의 씨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다. 그렇다고 이스마엘은 중요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분명 이스마엘 (=하나님은 들으신다)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깊은 생각과 마음을 들으셨다고 아브라함에게 강조하신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복을 주시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복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를 다산케 하고 크게 번성케 하실 것이고, 열두 통치자를 낳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언약이 중요하고, 누구와 세우는가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생각으로 논리에 따라, 최고의 인간적 조건에 따라 세워가지 않으신다. 그래서 언약이 기점이 되어 구분하신다.
17:21 그러나 나는 나의 언약을 사라가 내년 이맘 때 네게 낳아 줄 이쯔학과 더불어 세우리라." 하시더라.
아브라함과 결혼의 언약을 맺은 아내 사라의 몸에서 탄생할 이쯔학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세우실 것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의 뜻, 선택... 끝!
17: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야기를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17:23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그 날에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자기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들 중에서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들의 포피의 살을 베어내었더라.
17:24 아브라함이 자기 포피의 살을 베어낸 때는 그가 구십구 세였고
17: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의 살을 베어낸 때는 그가 십삼 세였더라.
17: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으며
17:27 그 집의 모든 남자들, 즉 그 집에서 태어난 자와 타국인들에게서 돈으로 산 자들도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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