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가 의도하시는 자녀양육은 무엇일까?

유대광야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지금까지 토라의 개념을 갖고 양육해 온 것 같다. 창조주는 샤마임과 땅을 통해 샤마임의 안보이는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땅의 보이는 피조세계를 통해서 알리셨다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 20절에 증언하고 있다. 거울 반사의 디자인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1:26-27), 더 구체적으로는 남자로 하여금 깊은 잠을 자게 하시면서 남자에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 여자를 남자와 마주보는 자리에 두시면서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되게 하셨다. 남자가 깊은 잠에서 눈을 떴을 때 한 고백은, "나 잖아!" (히브리 숙어) 였다. 남자의 본질은 여자, 여자의 근원은 남자. 뗄래야 뗄 수 없는 에하드하나 이상이지만 진정한 하나. 남편과 아내가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알아가도록 디자인하셨고, 둘의 관계 안에서는 수치심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관계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디자인하셨다. “샬롬 바이트.” 히브리어로 샬롬의 집을 뜻한다. 샬롬은 보편적으로 평화를 뜻하지만, 더 문자적인 의미는 온전함”(wholeness)이다. 내가 나의 온전함을 앎으로 경험하고 있으면, 진정한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창조주께서 원래 디자인하신 정체성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기쁨의 존재이 진리로 사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고 또 할 수 있는, 수치심, 죄책감 없이 실수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돌이키면서 또 연습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기쁨의 동산과 같은 장소가 바로 샬롬 바이트이다. 부모가 얼마나 우리 가정을 샬롬 바이트의 공간이 되도록 먼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오뚜기처럼 포기하지 않고 힘써 연습하고 있는가?

아들이 자라나면서 관찰해온 아이의 모든 행동은, 부모의 얼굴이 지니고 있는 태도, 아우라의 반응임을 인식하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아이는 부모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을 수없이도 경험하고 경험한 것이다. 부부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의 형제, 자매,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하루 속 이 순간, 저 순간에 아들에게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답은 결국 내가 하나님 안에서의 회복된 정체성 (예수님 때문에), 새 피조물의 정체성을 얼마나 인식하면서 삶에서 살고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아들 양육하면서 이러한 고민 속에 있을 때에, 유튜브에서 최민준의 아들 TV”를 접하게 되었다. 아들을 키우고 있는 수많은 엄마, 아빠를 실질적으로 코칭하고 격려하면서 아이들의 행동을 고치기에 앞서 더 본질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최민준 소장님은 어떻게 저렇게 토라의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을까?" 소위 "문제아"로 전문가들의 레이블링을 받은 아들들이 최민준씨와 미술을 통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 아이들이 자기 모습 그대로를 귀하게 받아들이고 평가하지 않는 어른인 선생님과 함께 편하게 미술활동을 하면서 무언가 안정적인 정체성 가운데서 활짝 피는 모습은 너무도 감동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토라의 본질적 개념에 대해 우리 유튜브에서 계속해서 나누지만, 삶에서의 실질적인 예를 들지 않으면 이해하기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내 자신도 오래 동안 경험해 왔다. 그러나 아들을 키우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토라 개념은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뼛 속 깊이 경험해 왔다. “최민준의 아들 TV”에서 나오는 수많은 를 보면서, 창조주의 진리는 정말로 맞다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어 이렇게나마 나누고자 한다. (“아들 TV”의 영상을 우리가 편집해서 우리 유튜브에서 다루게 되면 저작권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블로그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최민준 소장님이 말하는 내용을 토라의 개념으로 풀어보도록 하자 (토라의 개념은 붉은 색으로 덧붙였다). 



"자라다 남아 미술 연구소"        최민준 대표


훈육에 대한 오해와 이해


1. 오해:  "훈육 = 혼낸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습득한 비진리)

그런데 훈육은 혼내는 것이 아니다. 한번에 뜯어 고쳐줘야 한다--라는 생각에는 반드시 힘이 들어가고 과하게 다루게 되어있다. 그럴 때 아이의 경험은 "부당하다."이다. 사람은 한번 말해서 변화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두뇌의 디자인)--나를 포함해서. 나도 내 말을 안 듣는다. 회사에서는 회사원의 변화를 위해서 77번 반복해서 말하라고 한다. 하물며 미성숙한 나의 자녀는 한번 말해서 변할 수 있을까? 한번 말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러면 화가 치밀어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훈육의 이해:  훈육은 혼을 쏙빼는 "참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적당한 가이드라인과 규칙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알려주는 것이다.

신명기 6:4-9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손은 나의 행동을 의미)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미간은 나의 마인드를 의미)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2. 오해:  "훈육을 한번 할 때 의미가 있게 하기 위해 강도를 세게 해야 한다." 

여기서의 부작용은 아이가 훈육하는 사람을 무서워하기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훈육은 부모가 무서운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주고 다뤄줘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번에 세게 훈육해야 하는 것을 확신하는 부모에게는 오점이 있는데, 아이들이 문제나 실수를 한, 두번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번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매번 강하게 다루는 것이 부모에게도 힘들기 때문에, 부모는 마음 속으로 지켜보고 벼루고 있다가, 문제가 계속되면 세게 혼내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지켜보면서 벼루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세게 혼날 때 정확히 왜 혼났는지 헷갈려 한다. 부모는 속으로 아이의 실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지만, 자녀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언제는 운이 나빠서 혼났고, 언제는 운이 좋아서 안 혼났다--또는 오늘은 엄마 컨디션이 안 좋아서 혼났다는 결론으로, 결국 부모가 일관성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부모가 원하는 훈육은 실패한다.  

훈육의 이해:  훈육은 아이가 잘 못 행동할 때마다 차분하게, 되는 것, 안되는 것 등의 가이드라인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훈육은 마라톤처럼 지속력을 갖고, 침착하게 미성숙한 자녀를 가이드해 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1번과 똑같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습득한 비진리 -- 부모는 권위적으로 권위를 부려야 한다고, 안 그러면 애가 부모를 무시한다고, 관계성에 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잘 못 배운 것은 아닐까?

3. 오해:  "훈육할 때 아이에게 지면 안된다." 

여기서 부모의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는 "승부욕"을 주의해야 한다. 즉 아이와 승부를 보려고 하면 훈육은 절대 이루질 수 없다. 자녀와 '진흙탕 싸움'만 하게 되고, 그 결과는 너무 안 좋기만 하다. 많은 경우 부모가 무언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어서 자녀에게 주목하지 않고 훈육을 위해 시간을 들이지 않을 때에 일어난다. 그러니까 말로만 해결하려고 할 때에 언성이 올라가고, 위압적으로 강도도 따라서 같이 올라가면서 자녀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승부를 건다는 것이다. 이 때 꼬리를 곧바로 내리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승부를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아이들도 많다는 것. 그러면 체벌까지 갈 수 있는 불필요하면서도 안타까운 상황에 이르게 된다. 

훈육의 이해:  훈육과 승부는 구분해야 한다. 훈육은 부모가 침착한 가운데서 자녀의 눈높이에 눈을 맞춰 상황에 따라 정확한 행동의 기준을 알려주면서 가이드하는 것이다. 

  • 내 안에 자녀를 향해서도 승부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 결국 아이 훈육에 앞서 내 자신을 먼저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1, 2번과 똑같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습득한 비진리 -- 부모는 권위적으로 권위를 부려야 한다고, 안 그러면 애가 부모를 무시한다고, 관계성에 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잘 못 배운 것은 아닐까?

4. 오해:  "내 아이는 유독 내 말만 안 듣는다." (???!!)

훈육은 "어떻게" 하느냐 보다 "누가"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훈육의 힘은 권위에서 나온다. 그런데 '권위'를 이야기하면 '권위적이다'와 혼선을 일으키는데, '권위적이다'는 실제 권위가 없는 것이다. 권위는 없는데 권위를 부리고 싶은 사람을 보고 '권위적이다'라고 평가를 받는다. 부모의 말에는 권위가 필요하다. 엄마가 말씀하시면 자녀는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들에게 있어 '권위'라고 했을 때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권위'란?

"권위의 실체는 신뢰다." 내가 아이에게 한 약속들이 지속적으로 지켜지고, 내가 한 말은 내가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것을 자녀가 계속해서 경험할 때 부모의 말에 힘이 생기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신뢰가 형성된다. 부모의 흔한 실수는 아이와의 약속을 남발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해 신뢰를 잃으면서 권위도 함께 상실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부모의 말은 자녀들이 듣지 않는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를 평가하듯, 아이들도 부모를 평가한다. 아이와의 신뢰회복의 지름길--약속을 지키고 부모의 권위를 회복하자.

훈육의 이해:  부모의 권위는 신뢰로 형성한다. 권위적인 부모가 아닌, 권위 있는 부모가 되자.

1, 2, 3번과 똑같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습득한 비진리 -- 부모는 권위적으로 권위를 부려야 한다고, 안 그러면 애가 부모를 무시한다고, 관계성에 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잘 못 배운 것은 아닐까?

"거울 반사"의 토라 개념 - 발언을 통해 창조하시는 창조주.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지은 것 모두 그가 없이 형성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인류 / 사람은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부모의 말과 삶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거울처럼 그대로 습득하고 배워서 삶에서 반영한다. 


훈육의 핵심은 자녀에 앞서 부모인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아멘!


Q & A  

Q :  어쩔 수 없이 체벌을 하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  물리력을 행사하는 체벌은 가능하지만, 아이를 공격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만약 아이를 공격하는 행위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의 안전을 가장 보장하고 보호해야할 부모'가 나를 공격하면, 모든 신뢰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공격적인 체벌은 "훈육은 혼내는 것이다. 강도가 센 참교육을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 발생하는 문제이다. 체벌까지 가지 않기 위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미루지 말고, 그 때 그 때에 감정없이 정확하게 해주는 것이다. 아이를 지나치게 존중하며 키우는 부모를 보면, "안된다"라는 말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을 보게 된다. 

(1)  훈육 할 때에는 정확한 타이밍(문제발생)에 부모의 입장을 분명하게 알려줘야 한다. 

(2)  훈육에는 아이의 잘못된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예고하는 과정이 있다. 예) 너가 계속 놀고 싶은 것 이해하고, 너가 미워서가 아니라, 지금은 안되기 때문에, 너가 계속하면 엄마가 갖고 갈거야.--하고 미리 예고하고 계속 말 안 들으면 갖고가면 된다. 예고를 안하고 갖고 가게되면 아이는 엄마가 공격한다는 경험을 하게된다. 예고 없는 부모의 행위는 아이에게 공격으로 이해될 수 있다.

(1) 안된다고 분명하게 얘기해 주기; 

(2) 불순종하면 문제되는 것을 갖고 갈 것을 예고하기; 

(3) 그래도 불순종하면 강제집행하기. 강제집행시 엄마가 사회적 규칙에 따라서 제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엄마가 개인적, 감정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엄마는 개인적으로 아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정의 규칙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강제집행을 한다는 것을 아이가 인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27:52 - "오늘의 핵심"


질문을 하신 어머님이 잠언의 말씀을 언급했다. 그래서 잠언 말씀에서 "매"를 말씀하시는 본문을 찾아보았다:

잠언 13: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훈육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생각/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훈육하는 매가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매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 네가 그를 매로 때리면 그의 네페쉬(살아있는 생명의 존재)를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매와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오늘날 매를 사용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두 캠프가 대립하고 있다. 말씀이신 하나님의 지시의 의도를 잘 모르고 있는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행동에 모든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과 각 사람의 사정과 상황은 매우 복잡다난하다는 것이다. 
        나의 가치관과 생각체계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인 것 같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 새 피조물 정체성으로 사도 바울이 선포한 바와 같이, "메시아/그리스도의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기정사실에 따라서 매를 들고 자녀를 훈육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 사실 나의 마인드, 두뇌에 저장된 신념에 따라서 나의 매질은 무섭고 승부욕을 가진 폭군의 매가 될 수도 있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훈육하는 매가 될 수 있다. 
        토라는 내가 진리에 입각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도록 나를 광야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창조주 아버지는 우리가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엄마 뱃속에서부터 습득한 비진리로부터 자유해 진리 안에서의 진정한 새 피조물 정체성을 앎에서 삶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셔서 오늘도 우리에게 순간순간 말씀하신다.

우리의 취약점은 나의 정체성이 나의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에서 습득한 비진리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에서, 말씀에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말하기에 앞서,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새 피조물로 말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양육받아 옛 존재의 거짓 족쇄 같은 마인드에서 자유하고 변화하여 성장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