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에 파라샤를 읽으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창세기 16장을 부정적이지 않게 " " 있었다. 이러한 "보게됨" 나에게 설명할 없는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가지 창세기 16장을 읽을 때에, 나는 항상 오늘 날을 기점으로 해서 과거로 돌아가서 읽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오늘 날의 이슬람, 극단적 이스람, 이슬람으로 인해 세계가 발라간 (히브리어 - 엉망; 뒤죽이 박죽이) 되었고, 이스라엘을 지중해로 쓸어버리겠다고 하니... 이슬람을 생각하면서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것을 읽어왔기 때문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것을 막으셨더라면 이슬람을 없었을 아닌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16장의 사건을 보아왔고, 아브람과 사라이의 믿음 없는 연약함을 나름 조용히 한탄해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으로 15장과 연결해서 보기 시작했고, 연이어 17장하고도 연결해서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장과 " 끊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인지하면서 읽어보니, 아브람과 사라이의 믿음 없음을 보기보담,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한없는 "이해" (?) 친절하신 인도하심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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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창세기 16장과 로마서 11장을 연결시켜서 보게 되었다! - 열매를 맺는 올리브 나무는 이스라엘. 열방은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진 존재. 마치 하나님께서, "나의 "질서" 잊지 말아라!"라고 못을 박으시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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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KJV 번역본 성경 >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자식을 낳지 못하였더라. 그녀에게 ***이집트인 여종 있었는데 이름이 하갈이라.

15장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는 언약식이 있었음을 보았다.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샤마임의 별들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고, 구체적으로 아브람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주셔서, 이곳에서 영원히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경계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인지 알려주셨고, 현재 땅에서 10개의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음도 말씀하셨다.

여기서 한가지 위로가 되는 "아브람의 이해 과정" 있는 같다. 아브람이 똑똑해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브람의 한계를 너무 아셔서 과정, 과정을 통해서 아브람에게 이해시키시는 은혜를 있다.

아브람의 인간적인 논리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있다:
15:2 아브람이 말씀드리기를 "나는 자식이 없사오며 집의 청지기가 다마스커스의 엘리에셀이오니, 하나님이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하고
15:3 아브람이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주께서 내게 씨를 주시지 않았으니, 보소서, 집에서 태어난 자가 상속자가 것이니이다." 하니

고대근동에서 살았던 아브람의 입장에서, "후손" 생각했을 때에, 15 2-3절의 1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 자신의 몸에서 나올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 라고 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16장을 읽으면, 아브람과 사라이가 다음으로 내릴 있는 논리적인 결론은 바로 사라이의 제안이다. 16 1절은 사라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읽는 사람도 1절을 읽으면, ", 그러면 여종 하갈을 통해서 후손을 낳으면 되겠네"라고 결론을 내릴 있다 ( 당시 문화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 "이집트인 여종" 하갈. 이것을 15장에 일어난 사건과 이어서 보게 것도 처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깊은 (tardemah/타르데마) 들어가게 하신 , 아브람의 후손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을 하셨다 15:13-14  "...너는 분명히 알지니, 씨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타국인이 되어 그들을 섬길 것이요, 그들이 사백 동안 자손을 괴롭게 하겠고 14 그들이 섬길 민족을 내가 또한 심판하리니, 후에 그들이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결국 타국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가족을 인구적으로 거대한 백성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타국은 어딘가? 이집트! 야곱/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이집트의 종으로 살다가 해방되는 구속과 구원의 기적을 경험하게 것이다. 그런데 16장에서의 사건은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열국의 어미의 이름을 갖게될 사라이의 이집트인 여종 하갈... "하갈" 의미는 외국인 또는 이민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앞으로 이집트 바로의 종이 것이지만, 과정은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하나님 관점에서 열국의 아비와 어미는 17장에서 이름이 바뀌어지는 "아브라함" "사라"이다. 이들, 그리고 이들의 씨를 통해서 "열방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을 "이고, 여기에서 이집트인 여종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도 들어간다. 이렇게 작아보이는 디테일을 말씀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하나님의 인류의 구속을 위한 총체적 질서 (seder/쎄데르) 짚고 넘어가시는 것처럼 보여진다.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기를 "보소서주께서 나를 수태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청하오니, 여종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인하여 자식들을 얻을까 하나이다." 하니 아브람이 사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더라.

여기서 사라이는 분명 창조주께서 그녀를 수태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15장에서 창조주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오는 씨를 통해서 언약을 성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논리로 다음 "단계", 당시 문화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 사라이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말씀은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브람이 사라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더라." 성경에서 "쉐마" 너무도 중대한 개념이다. 히브리어로 "듣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냥 듣고 만다가 절대로 아닌, 듣고 행동으로 이행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들음" 뜻하고 있다. 창세기 1-2, 특히 2 8절에서 창조주는 인류를 당신 안에 두신 기쁨 동산 안에 두셨음을 계시해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 , 그것도 아름답고 기쁨 자체인 동산 안에 존재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마치 하나님의 심중, 태에 우리를 두신 것과 같은 지극히 아름답고 친밀한 그림이다. 엄마의 안에 있는 아기는 엄마의 모든 음성이 너무도 들린다. 엄마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창조 전서부터 창조주 기쁨 동산에서 창조주의 음성을 들을 있도록 디자인 되었고, 환경만이 인류의 환경으로 창조주는 의도하셨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말씀이 이렇게 표현했을 때에,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을 없다:  "아브람이 사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더라." 이렇게 말씀만 하시고, 이것이 일이다, 못한 일이다--라고 흑백논리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녀의 여종 이집트인 하갈을 데려다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그의 아내가 되도록 주었더니, *이는 아브람이 카나안 땅에 년을 거한 후였더라.

*Q:  사건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주시는 것일까?
인간적으로 1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렀고, 그러한 인간적인 느낌에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암시해 주시는 것일까? 그러니까...아브람과 사라이가 서두른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걸려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나님도 익히 알고 계심을 암시해 주는 것인가?  

16:4 그가 하갈에게로 들어가니 그녀가 임신하였더라그녀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나서 그녀의 여주인을 멸시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인 같다. 상황에 따라서 태도가 바뀌고, 말과 행동이 바뀌는 . 나는 나의 정체성에 따라서 항상 살고 숨쉬는 것이 마땅한데, 정체성과는 걸맞지 않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

"
멸시하다" = 문자적: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고 대하다 => 우습게 여기다 => 멸시하다

여종 이집트인 하갈은 아무리 아브람의 , 자녀를 잉태하여 임신하고 낳았다 하더라도 정체성은 사라이의 여종이다. 사실은 사라이가 너무도 알고 있겠지만, 그녀 보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알고 계신다. 대하 드라마나 중국 영화를 보면, 왕의 총애를 받는 여자가 결국 모든 것을 휘두르게 된다는 것을 보고 보아왔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천만 다행!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노예제도를 찬성하시는 "으로 이야기를 해석하면 아니되리라. 이야기의 포인트를 놓치면 아니되리라.)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기를 "나의 모독은 당신이 받아야 하리이다. 내가 여종을 당신의 품에 주었거늘, 그녀가 자기가 임신한 알고서는 나를 멸시하니, 주께서 나와 당신 사이를 판단하시리이다." 하니

사라이는 여기서 얼마나 억울할까? 그러나 자신이 제안한 "무덤"이었는데... 무덤을 파고 억울해 하면... 그런데 한가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브람이 가장으로서 질서를 잡아줘야 한다는 . 왜냐하면 사라이가 이렇게 호소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와 당신 사이를 판단하시리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Honey, do something! Let's get the house in order, please!" 사라이는 마치 아브람에게 가장으로서 질서를 잡아달라고 호소하는 같다.

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기를 "보라,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안에 있으니, 당신에게 좋을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하기에 사래가 그녀에게 심하게 대했더니, 그녀가 사래의 면전에서 도망하였더라.

그러나 여자들 사이의 무시무시한 시기질투의 부딪힘에서 아브람은 발을 빼고 만다. 여기서 아내를 안정시키고, 그녀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말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의 사랑스런 아내 사라이, 그러시오? 당신은 집안의 여주인이자 어미이오. 하갈이 임신했다고 바뀌는 것이 무엇이 있소? 진정하시고, 내가 하갈과 이야기 하리이다." 그리고 하갈에게는, "네가 자리를 지키기를 바란다. 여주인이 너에게 은총을 베풀었는데, 그러한 옳지 못한 태도를 보여서 되겠느냐? 우리 집안의 샬롬을 깨는 태도나 행동을 허용할 없느니라." (너무 드라마를 쓰는 것인가???)

사실 아브람이 머리 끝까지 열받은 사라이에게 허락한 것은 ("알아서 하시오"), 하갈에게 있어서는 "끝장"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브람의 대답은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같다. 사라이는 남편의 말에 따라서 여종 하갈을 도망가게 정도로 심하게 대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는 가족은 지금 콩가루가 되고 있다!

16:7 주의 천사가 광야의 샘물 ,  술로 가는 있는 곁에서 그녀를 만나

"샘물" - 하나님은 생명 수의 근원이시다. 사건이 샘물에서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떠신 분이신지를 말해주고 있는 같다.

"술로 가는 " 이집트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실 수밖에 없으시다... (과거에는, "하갈이 그냥 이집트로 도망했으면, 이스마엘은 이집트 어디선가 태어나고, 결국 오늘 이슬람이 탄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갈을 돌아가라고 하셨을까?"-- 두고 고민을 했었는데... 현재의 상황을 말씀에 집어 넣어서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니 새롭다.)

16:8 말하기를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여주인 사래의 면전에서 도망하나이다." 하더라.

역시,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사라이의 여종 하갈아". 하갈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시한번 하갈로 생각하게 하신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종으로서 사실 곳이라고는 없다. 주인 밑에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특히 경우 가장 안전한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라이가 받은 상태라서 지금은 잠시 안전하지 못하지만...)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또는 하나님의 사자가 질문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야곱에게는, " 이름이 무엇이냐?" 항상 본질적인 질문, 정체성을 다루는 질문을 하시면서 생각하게 만드시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도 군더더기 없이 적중하는, 심장을 찌르는 질문을 하신다:  "사라이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군더더기 없는 진실이 답으로 나온다:  "나는 여주인 사라이의 면전에서 도망하나이다."

16:9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녀의 아래서 복종하라." 하고

나는 하나님의 사자의 (=하나님의 )에서 로마서 11장을 생각하게 되었다.
"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녀의 아래서 복종하라."라고 번역했지만, "복종"이기 보다, 히브리어 "ana/아나"라는 표현은 문맥상 "스스로 겸비하라"라는 의미가 정확하다. 또한 " 여주인에게 돌아가서"에서 "돌아가다" 히브리어로 "슈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실제 문리적으로 돌아가는 것도 있지만, 회개하다는 의미에서도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계심을 있다. 하갈은 자신의 임신한 상황에 따라서 교만해졌고, 자기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여주인, 자기에게 은총을 베푼 여주인에게 배신을 때리고 우습게 대하고 여겼었던 (문자적: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고 대하다)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범했었다. 이러한 하갈에게, " 정체성을 잊지 말아라. 네가 마땅히 있을 곳으로 돌아가서 (슈브) 그녀의 아래서 스스로 겸손하라."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에 적중!

16:10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내가 씨를 크게 번성케 하리니, 수가 많아 없게 되리라." 하더라.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다른 씨와 라인을 축복하신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정체성에 너무도 정확하게 걸맞게 역사하심을 나는 목격하고 있다! --"내가 씨를 크게 번성케 하리니, 수가 많아 없게 되리라". 어떻게 이렇게도 여유로우실까? 여기서 창세기 12:1-3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이 있기 때문이다. " 안에서 지구의 모든 가족들이 축복받을 것이다." 당신의 축복을 통해 지구를 가득히 매운 인류를,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다시 자녀로 삼으셔서 (새피조물), (에하드) 가족의 (에하드) 아버지가 되어 하나의 가족을 이루실 에하드이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여기서 나는, " 축복하셔서...이스마엘을 인용해서...이슬람이 만들어져서...이스라엘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16:11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보라, 네가 아이를 가졌으니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주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라.

하나님은 하갈에게 당신이 어떠하신 분이신지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다! "잉태하게 것도 나의 역사다. 내가 아들을 갖게 하였다. 그에게는 내가 주는 데스티니가 있다--그의 이름은 이스마엘 (하나님은 들으신다)이다. 나는 너의 고통/어려움을 알고 있다." 하갈은 이스마엘의 어미로서 앞으로 아들에게 본인이 만난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할 있게 되었다. 하갈은 과연 이스마엘을 어떻게 키우고 교육했을까? 어쨌든, 하나님을 만난 나는 나의 아들에게 창조주요 구원자이고 생명이신 분을 증거하고 증거하는 증인을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16:12 그가 *거친 사람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할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대적할 이라. ***그가 그의 모든 형제들 면전에서 거할 이라." 하니라.

말씀을 다르게 번역할 있는 같은데... 다른 가능성을 정말 알고 싶다!

지금까지의 창세기 문맥을 따라서 생각하게된 나의 번역 (확인이 필요하다):
* 거친 사람 = wild adam (야생 인류 = 야생 올리브 나무??)
**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이지만 언약의 아들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 찾기 위해 다른 "형제"들을 자기의 정의대로 다스리고 컨트롤하고자 한게 아니었을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스림은 섬김인데 말이다... 군림하는 인간적인 다스림으로 자기 자리를 다른 형제들로부터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강요하고자 하는 "야생 인류" 길을 것을...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모든 형제들 면전 = 모든 형제들 앞에서 (얼굴을 마주 보듯) 거할 것이라
==> 이스마엘이 모든 형제들 앞에서 얼굴을 마주 보면서 거하기 때문에이스마엘의 빗나간 정체성이 그의 얼굴에서 반영되면서... 모든 열방의 정체성도 이스마엘의 빗나간 얼굴을 보면서 형성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16:13
그녀가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의 이름을 부르기를 "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서 나를 보고 계신 분을 뵈었는가?" 함이라.

하갈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났으니 말이다! 하갈이 하나님의 이름을 본인의 놀라운 경험에 따라 이렇게 불렀다:  "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나이다." 얼마나 놀라운 간증인가! 하갈은 사건을 절대로 잊을 없었을 것이다.

16:14 그러므로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니, 보라, 그것은 카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생명수의 근원이신 하나님...

16:15 하갈이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불렀더라.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증인이 되었음을 있다. 다시 여주인인 사라이에게로 슈브/돌아가서, 일어난 역사를 나누었음을 본다. 아브람이 탄생한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말씀하신 지시에 따라서 이스마엘이라고 했다.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아브람은 팔십육 세였더라.